넘어가기 메뉴




전쟁의 역사속으로

부산진성전투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로, 1592년 4월 13일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조선 침략 선봉군인 제1군 18,700명의 대군은 700여척의 병선으로 부산포를 내습해 왔다.
부산진성전투 당시 부산 첨사는 정발(鄭撥)이었다. 부산진성은 경상도 해안지방에 설치된 수군 첨절제사의 진영인 부산포진, 다대포진, 가덕진, 미조항진 등 4개 진 가운데 경상도 제1의 해상관문으로서 일본군들이 조선에 상륙할 때는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이었다. 그리고 부산포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왜관이 있어서 다수의 일본인들의 제한적인 출입이 유일하게 허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다수의 일본인들이 체류하였으므로 대마도에서 차출된 군인들은 부산의 지리에 익숙했다.

한편, 당시 부산진성의 민호는 300여 호로 군민을 합하여도 적의 대군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실제 병력은 불과 1,000 여명이었다. 그러나 적군의 공격에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였으나, 왜군들의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假道)를 요구하였으나, 정발장군은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는 등 전투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열세에도 정발장군을 위시한 부산진의 군, 관, 민들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아무튼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아군이 적을 맞이하여 처음 치른 전투로서 군사수와 무기 면에서 적과 비교하여 현저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관, 민이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상륙 당일로 부산포진을 점령함으로써 조선군의 해안 방어세력을 제거하고 조선침략을 위한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관련 유적으로는 정공단과 부산진성터, 부산진지성(자성대), 부산진순절도가 있다.

동래부성전투

동래성전투는 1592년 4월 15일 일본군 선봉부대와 조선군 수비대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로, 4월 14일 오전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적군은 동래로 진출하였다.

동래부성전투

동래는 부산진과 가까운 거리였고, 또 부산의 행정 관할은 동래부에 있었다. 당시 동래부사는 문관 출신의 송상현(宋象賢)이었다. 송상현의 수성 계획은 일차적으로는 지역의 병권을 가지고 있던 경상좌병사의 군과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싸울 예정이었다. 당시 경상좌도 군사책임관이었던 경상좌도 병사는 이각(李珏)이었다.

이각은 울산에서 동래성을 지원하려 왔다가 일본군의 군세가 막강함을 보고서는 뒤에서 계속 지원하겠다고 하고서는 성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그리고 직접 부사의 명령계통을 아니었지만, 부산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는 박홍(朴泓)이었다. 그는 부산포에 적이 닥치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양산군수 조영규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달려가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기로 하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송상현 부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이미 부산진성 전투에서 조선민의 굳센 항전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포위, 공략했으므로 격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동래성 전투는 15일의 경우 시간적으로 보면 부산진성 전투보다 전투시간이 짧았다. 대격전은 우리측에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마침내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다대포성전투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 군(軍)은 기세를 타고 인접 지역의 서평포와 다대포진을 공격하였다. 두진영의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서평포와 다대포가 모두 지금의 부산 영역이었지만 부산포보다 군사적 지위가 낮았고 고을규모도 작았으며, 외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195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된 후 적군의 다수 병력은 동래로 향하고, 나머지 소수의 병력은 다대포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저항으로 격퇴를 당하자 15일 일본대군의 공격을 다시 받아 다대포성은 함락되었으며, 첨사 윤흥신(尹興信)과 동생인 홍제 등 군, 관, 민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일본군들은 상륙이후 경상도 해안지역의 요충인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점령함으로써 조선군의 해안 방어세력을 제거하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김해성전투

1592년(선조 25) 4월 19일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끈 제3군의 주력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해상으로 죽도(竹島)에 상륙하였다. 죽도는 낙동강 하류에서 김해강 지류가 합치는 곳으로 능히 전선이 정박할 수 있었다.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이곳에 초선(哨船)을 이미 띄워놓고 적정을 탐색중이었다. 적은 먼저 이 배를 탈취하고 감시병을 쫓아 김해성에 도달하고는 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부사는 비상태세를 갖추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 있었다. 적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계속하면서 공격을 가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성안에는 군사가 적고 외부로부터 지원이 없어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이때 적은 성벽이 높고 못이 깊어서 쉽게 함락하기가 힘들어 보였으므로 성 주변에 있는 보리이삭과 볏짚을 날라다 야음을 틈타 비밀리에 못을 메우기 시작하여 그 높이를 성과 같게 하고 여기서 활과 총을 난사하였다.

겁에 질린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먼저 도망하자 부사도 도망하고 따라서 군민의 일부도 흩어졌다. 왜군이 못을 메운 동문 쪽 성벽을 넘어 난입하자 끝까지 성을 지키고 있던 군민들은 적과 격렬한 백병전을 전개하여 쌍방간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끝내 성은 함락되었다. 적은 다시 창원을 공략하고 뒤이어 영산ㆍ창녕ㆍ현풍을 거쳐 북상하였다.

경주성전투

임진왜란 때 박진(朴晋) 등이 경주수복을 위하여 싸운 전투로, 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부산포에 상륙한 가토(加藤淸正)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공격하자 때마침 경주부윤의 교체가 있었는데, 전임 부윤 윤인함(尹仁涵)은 후임으로 오는 변응성(邊應星)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하였다. 이에 판관 박의장(朴毅長), 장기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군민 수천명을 모아 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박의장도 버티지 못하고 도주해버렸다. 이튿날 왜군은 영천을 점령하고 충주를 향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경주는 아군의 무저항으로 말미암아 왜적에게 무혈점령당하고 말았다.

2차 전투는 그해 7월 의병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경상좌병사 박진은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병력을 권응수의 휘하에 합세시켜 근 1만의 병력으로 그해 8월 경주탈환을 목적으로 권응수ㆍ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언양방면에 있던 적 구원병의 기습을 받아 박진의 군사는 패주하고 말았다.

3차 전투는 2차 전투에서 패한 박진이 재차 경주탈환을 결의하고 결사대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성 밑에 잠복시켰다. 한편,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 등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공격준비를 갖추었다. 이에 판관 박의장을 선봉으로 그해 9월 다시 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비격진천뢰의 공격으로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근 1만석의 군량을 버린 채 이튿날 울산 서생포(西生浦) 방면으로 퇴각하였으며, 마침내 경주성은 수복되었다. 그뒤로 왜군은 비격진천뢰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4차 전투는 1593년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남도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철수시켰던 때이므로, 경주성 방면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왕필적(王必迪)의 군사가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었다.
아군측은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영천조방장(永川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후원하고, 명군도 참장(參將) 낙상지 (駱尙志),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등이 와서 도왔다.
한편, 적장 가토와 모리(毛利吉成) 등의 군사는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주 경주성 방면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8월 6일 불시에 수천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하였다. 이로써 쌍방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아군은 명군과 합세하여 끝내 적군을 격퇴시켰다.

이 싸움은 국난을 당하여 개전초에 분연히 일어난 민중의 힘으로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으며, 특히 비격진천뢰라는 새로운 과학무기의 위력을 보여준 싸움이었다는 데에서 또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상주전투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은 삼로(三路)로 나누어 북상하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17일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고, 성응길(成應吉)ㆍ조경(趙儆)을 각각 좌우방어사(左右防禦使)로 삼아 영남으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문경을 거쳐 23일에 상주에 도착하였는데, 상주목사 김해(金懈)는 이미 도주하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비어 있는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곡식을 풀어 백성을 모으고,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여, 상주 북방 북천(北川)에 진을 치고, 고니시(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에 대항하였다. 이 싸움에서 이일과 종사관 윤섬ㆍ박호, 찰방 김종무, 병조좌랑 이경류 등이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이일만이 퇴로를 헤치고 문경으로 빠져나옴으로써 상주는 적의 수중에 함락되고 말았다.

충주전투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대패한 전투이다.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 등이 "우리의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니, 앞에는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27일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으나,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敵情)을 정탐할 수 없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선조 - 태합기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성에 돌입하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右軍)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하여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하여 조선의 관군은 크게 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십명을 사살한 뒤에 힘이 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우리의 군대를 믿고 피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한편,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왕은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옥포해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옥포(玉浦:경상남도 장승포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왜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이 계속 북상하자, 당황하여 남해현 앞바다에 피신해 있던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율포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적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였다.

옥표해전도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휘하의 장수와 의논 끝에 출전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조정에 알리는 한편, 원균에게 양도의 수군이 집결할 장소를 약속하였다.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자 본영(本營:지금의 여수) 앞바다에 집결한 휘하장병과 전선을 점검한 뒤 전대(戰隊)를 편성하니, 전선(戰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이었다.
5월 4일 본영을 출발하여 소비포(所非浦:고성군 하일면 춘암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원균의 전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하여 송미포(松未浦:거제군 동부면)에서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 뒤 5월 7일 전함대가 동시에 출항하여 옥포근해에 이르자 척후장(斥候將)인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으로부터 적을 발견한 신호를 받았다.
이때 도도(藤堂高虎) 지휘하의 왜선 30여척은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흩어져 있고, 왜적들은 포구로 들어가 분탕하고 있다가 아군의 기습공격에 당황하여 6척을 앞세워 해안을 따라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아군은 이를 포위하고 맹렬하게 포격을 가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3명을 구출하여 임진왜란중 해전에서의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날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으며, 미처 승선하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아군은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하여 영등포(永登浦:거제군 장목면)를 거쳐 합포(合浦:마산시)에서 5척, 다음날 적진포(赤珍浦:통영군 광도면)에서 11척을 각각 분파하고 9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계를 받았다.

양주전투

임진왜란 때 신각(申恪)이 경기도 양주에서 왜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1592년(선조 25) 5월 2일, 서울을 향하여 쳐들어오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한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적에게 패퇴, 임진강 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곡(山谷)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경도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만나 그들과 합세하여 한성의 왜적 토벌을 논의하던 중 양주를 중심으로 한성에 출입하는 적의 활동이 매우 빈번하다는 정보를 확인한 뒤, 해유령(蟹踰嶺) 부근에 잠복하여 있다가 적의 귀로를 요격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5월 중순 어느 날 저녁, 무질서한 행군으로 해유령을 넘어오던 일본군 1개부대를 맞아 미리 매복 중이던 조선 군사들이 완전한 포위상태에서 적을 급습, 순식간에 70여명의 적병을 참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왜군이 부산상륙 이후 조선군사가 올린 최초의 큰 전과였으나 피난길에 오른 조정에서는 길이 막혀 그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이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가장 큰 공을 세운 부원수 신각이 한강 방어전에서 도원수의 명령에 불복하여 달아났다는 김명원의 그릇된 보고에 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그를 처형시켰다.

뒤에 김명원의 보고가 허위였음이 드러나고 양주전투에서 세운 신각의 공이 조정에 알려져 처형을 중지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가 죽고 난 뒤의 일이었다 한다.

임진강전투

임진왜란 때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이 임진강에서 관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북침을 막으려다 패한 싸움.

1592년(선조 25) 한강 수비의 책임을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으로 퇴거하여 장계(狀啓)를 올려 적의 상황을 보고하자 선조는 김명원의 한강방어 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고 다시 경기ㆍ해서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강을 지킬 것을 명하는 한편, 남병사 신할(申劼)이 체직(遞職)되어 돌아온 것을 수어사로 삼아 함께 임진강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임진강 방어에는 명령계통이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는 도원수 김명원과 그 휘하에 부원수 이빈(李蘋), 독진관 홍봉상(洪鳳祥), 경기감사 권징(權徵), 조방장 유극량 (劉克良), 검찰사 박충간(朴忠迀), 좌위장 이천(李薦), 방어사 신할 등과, 둘째는 제도 도순찰사 한응인(韓應寅)과 부사 이성임(李聖任), 셋째는 임진강 상류 대탄(大灘:지금의 경기도 연천부근)에 전 유도대장(前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순변사 이일(李鎰), 전 부원수 신각(申恪) 등의 군사가 포진하고 있었다.
병력수는 도원수 휘하에 7,000명, 제도도순찰사 휘하에 서계토병(西界土兵) 1,000명, 전 유도대장 휘하에 5,000명, 도합 1만3000명이었다.

일본군의 진용을 보면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새로운 작전계획을 짜고, 우키다(宇喜多秀家)는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전군을 총지휘하고, 1번대(番隊)의 주장 고니시 (小西行長)는 평양으로 가고, 3번대의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는 황해도로 가서 1번대를 후원하고, 2번대의 주장 가토(加藤淸正)는 함경도 방면으로 가고, 4번대의 주장 모리(毛利吉成)는 강원도로 가서 2번대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다른 군에 앞서 가토군은 1592년 5월 10일 서울을 떠나 임진강에 도착하였으나, 강물이 급하여 건너지 못하고 며칠을 기다렸다. 이때 고니시가 권항사(勸降使) 야나가와(柳川調信)를 조선군 진영에 보내자, 가토는 강변에 소수의 군사만 남겨두고 파주 쪽으로 철수하였다.

조선 진영에서는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하다는 헛된 보고가 계속 날아드는 데다 적이 여러 날 싸우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실로 믿고 행조 (行朝)에서도 도원수에게 엄책하여 속히 싸울 것을 명하였다. 조방장 유극량은 강을 건너 싸우자는 제장(諸將)의 주장을 듣고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드는 것이라 하여 극구 반대하였으나, 군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패배를 예견하였지만 신할을 따라 도강하였다. 도원수도 도하작전을 반대하였지만 명령계통이 분분하여 이를 막지 못하였다.

17일 가토군의 기습을 받아 신할ㆍ유극량 등의 장수가 전사하였으며, 많은 관군이 돌아오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 결국, 큰 기대를 걸었던 임진강방어전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일본군은 27일 임진강을 건넜고, 도원수 김명원과 도순찰사 한응인 등은 패한 다음 평양 행재소(行在所)로 돌아왔으나, 선조는 형편상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용인전투

임진왜란 때 서울수복을 위하여 북상하던 하삼도(下三道)의 관군이 용인 광교산(光敎山)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도내 관군을 모집한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본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시지(李詩之)를 선봉장에 임명하여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경유하여 금강을 건넜다.

한편,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 백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 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지금의 평택군 진위면)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니,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주하여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용인ㆍ수원 등지에는 일본 수군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의 휘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군 1,600명을 거느리고 육상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그 주력 1,000명은 서울에 주둔하였으며 잔여 600명은 부장(部將)인 와키사카와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 등이 거느리고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곽영과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봉장 이시지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장 와키사카는 곧 휘하병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향하였다. 원병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공격 차비를 갖추었다. 백광언과 이시지는 무질서하게 선두에 서서 관군을 지휘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잔여 관군들은 이광의 본군(本軍)에 수용되어 함께 광교산 서쪽으로 진출하여 설진(設陣)하였으나, 군의 사기는 이미 저상하였다. 충청도의 관군은 수원으로 전진하여 먼저 이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4일 아침 용인 방면으로 철수하였으므로, 군사를 돌려 전라도군과 합세하여 설진하였다.6일 아침 이광은 다음 싸움을 위하여 일제히 아침을 먹던 중 불시에 일본 기병의 기습을 받고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권율만은 휘하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그뒤 7월 8일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 (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이 싸움에서 대패한 죄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주로 돌아갔으나 곧 파직되었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으며, 충청병사 신익(申翌)은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사천해전

사천해전도 - 제승당

1592년(선조 25) 5월 29일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서 13척의 왜선을 무찌른 해전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5월 29일 본영(여수)을 출발,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온 원균(元均)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곤양 쪽에서 사천으로 향하는 왜선 1척을 발견하고 뒤쫓아 격파하였다. 그때 사천선창에는 왜선 12척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열박(列泊)해 있었다. 이순신은 때마침 조수가 나가 전선의 활동이 좋지 못함을 판단하고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세워 퇴각할 기세를 보이게 하자, 적들은 외양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뒤 이순신은 조수가 밀려드는 것을 계기로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 적함대 가운데로 먼저 돌진하게 하자, 뒤따른 전선들도 일제히 철환(鐵丸)과 장편전(長片箭) 등을 쏘아 왜선 10척을 분파(焚破)하고 다음날 나머지 2척도 분파하였다.

전투중 거북선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羅大用)이설(李渫) 등이 화살을 맞아 부상당하였으며 이순신도 왼편 어깨에 철환을 맞았다. 이 전투는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한 해전이다.

당항포해전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이다.

1차 해전은 1592년(선조 25) 6월 앞서 있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물고 있음을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1척으로 공격,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賊首)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2차 해전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1594년 3월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見乃梁)과 증도(甑島)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譚)에게 군사 31인을 주어 왜선을 치게 하여 당항포 근해의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浦口)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의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율포해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수군이 율포에서 왜선을 무찌른 해전이다.

1592년 5월 29일 겨우 23척으로 제2차 출전을 단행한 이순신은 중도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3척과 합세하여 사천ㆍ당포(唐浦)에서 왜선을 무찌르고, 이어 뒤따라 온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棋)의 25척과 합세하여 당항포(唐項浦)에 침범한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6월 7일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을 경계하던 중 왜의 큰 배 5척과 중간배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발견, 이순신이 즉시 추격을 명하자 율포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여러 전선들이 역풍에 노를 재촉하여 율포 근해까지 추격하자 다급해진 왜선들은 배안의 짐짝을 버리면서 뭍으로 도망치려 하므로, 우후(虞侯) 이몽구(李夢龜)가 큰 배 1척을 나포하고 1척을 불태운 것을 비롯하여 우척후장 김완(金浣), 좌척후장 정운(鄭運), 중위장 어영담(魚泳潭),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 등이 서로 힘을 합하여 왜선 5척을 나포 또는 격파하고 수많은 왜병의 목을 베었다. 이때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본 왜장 구루시마(來島通之)는 뭍으로 도망쳐서 자결하고 말았다.
뒤이어 여도권관(呂島權管) 김인영(金仁英)과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은 위험한 적중에 돌입하여 남은 왜병의 목을 베는 등 마지막 승리를 장식하였다.

이 해전은 제2차 출전 때의 마지막 전투로서 제1차 출전 때의 합포(合浦) 및 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와 같이 소수의 왜선을 상대한 것이지만 이순신의 철저한 경계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한산도해전

임진왜란 때 한산섬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및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조선수군이 왜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ㆍ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ㆍ당포(唐浦)ㆍ당항포(唐項浦)ㆍ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증강하여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로 침범하고, 역시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는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한산도해전도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7월 6일 본영을 출발, 노량(露梁: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거느리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이어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 (金千孫)으로부터 왜선 70여척이 견내량(見乃梁:거제군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자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하고 전략상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하여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으로 하여금 왜수군을 공격하게 하여 반격해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도록 하자, 왜수군들은 그때까지의 패전을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하여왔다.
전기(戰機)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으로 하여금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여 공격하게 하자, 여러 장령(將領)과 군사들은 지자ㆍ현자총통(地字ㆍ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하여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함으로써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으며, 400여명의 왜병사들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하였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이 해전을 진주성대첩ㆍ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이 대첩은 왜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함으로써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고, 그때까지 육지에서의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으며, 조선수군이 남해안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 위협을 주어 그때까지 매우 불리하였던 임진왜란의 전국을 유리하게 전환시킬 수 있었다는 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외국의 사가(史家) 헐버트(Hulbert, H.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해전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있었던 안골포(安骨浦:진해시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ㆍ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웅치전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전투의 하나로,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은 험한 웅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김제군수 정담(鄭湛), 남해현감 변응정(邊應井) 등은 군대를 연합하여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우세한 대대적인 왜군의 재차 공세를 받아 우리 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이복남은 퇴각하고, 정담과 변응정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용전하여 적병 수백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포위되어 모두 죽었다. 전주를 보수(保守)함에 있어 이들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우리 군사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표목(標木)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 써놓고 금산으로 퇴각하였다.

이치전투

1592년(선조 25) 7월 8일에 금산(錦山) 서평의 이치(梨峙:배재)에서 아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이다.

당시에 아군은 전라도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 1, 500명이었고, 왜군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6번대 소속의 별군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熊峙戰鬪)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 종일의 전투 중에 황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졌으나 권율이 장병을 독전하여 왜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라도가 보존되어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한편, 왜군은 이 전투를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안골포해전

1592년(선조 25) 7월 9일,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안골포에서 일본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이다.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이 원균ㆍ이억기 등과 합세하여 한산섬 앞바다에서 왜수군장 와키자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加德)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왜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탐망꾼의 보고를 듣고, 10일 새벽 작전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본대가 접전하게 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고, 이순신의 함대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맨 먼저 진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하자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왜선들은 모두 42척으로서 그 중에 3층으로 된 큰 배 1척과 2층으로 된 큰 배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떠 있었는데 수군장 구키(九鬼嘉陸)와 가토(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제2의 수군 주력이었다. 그러나 포구의 지세가 얕아서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왜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으나 왜병들은 험고한 곳에 의지하여 응하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계획을 변경, 여러 장령에게 번갈아 포구 안에 출입하면서 총통과 장편전(長片箭) 등으로 왜선을 공격하자 왜병들도 대응하였고, 때마침 이억기의 함대가 달려와서 합세하게 되자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특히 왜병들은 사상한 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병사들을 큰 배로 옮기는 등 총력을 기울였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싸움에서 왜선들은 결국 거의 깨지고 250여명이 사살되자 나머지 왜병들은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이순신은 승리와 함께 이들 왜병들이 밤중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올 것을 예측, 왜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이틀 전 한산해전의 승리와 함께 일본 수군의 주력을 격멸하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금산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8월 18일, 충청도 금산에서 의병장 조헌(趙憲)이 거느린 의병과 왜군과의 싸움이다.

승병장 영규(靈圭)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서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하기로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라 온양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여,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백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하기를 원했다.

이에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은 금산에서 전사하고, 남평현감(南平縣監) 한순(韓楯)의 군사 5백명도 패퇴, 전사하였다.
8월 16일에 조헌은 할수없이 남은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떠났다. 이때 별장 이산겸(李山謙)이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에서 패퇴해오면서 “왜군은 정예대군이라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고 했으나, "국왕이 당하는 판에 신하가 어찌 목숨을 아끼랴."하면서 그의 만류를 거절하였다. 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許頊)도 조헌의 고군진격(孤軍進擊)을 말리면서 기일을 정해 함께 협공하자고 제의해왔으나, 조헌은 그들의 머뭇거림을 분하게 여기며 7백명 만을 거느리고 고개를 넘었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에게 글을 보내 다시 승군과 합진해서 8월 18일 새벽 진군하여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관군의 내원(來援)을 기다렸다.

한편,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전군을 나누어 교대로 공격해왔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하여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명의 이탈자도 없이 모두 순절하였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이 싸움에서 왜군도 죽은 자가 많아 3일간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우고, 무주와 옥천에 집결해 있던 왜병과 함께 퇴각해버렸다. 이로써 호남ㆍ호서지방이 안전하게 되었으며 나라를 회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해 9월 왜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문인 박정량(朴廷亮)이 의사 7백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니 후세에 이를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

평양성전투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일본장수 고니시(小西行長)의 군대와 싸운 네 차례의 싸움이다.

1차 싸움은 1592년(선조 25) 5월에 있었다.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들어와 새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로 하여금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 (李元翼) 등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합하여 3, 000 ~ 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계획도 없었다. 다만,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부근의 숲에 드문드문 걸어놓고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는 정도였다.
13일 대동강에 도착한 고니시의 군대는 강 언덕에 10여둔(屯)을 만들고 짚으로 막을 짓고 여러 날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평양성 1차 전투에서 퇴각하는 명군 - 태합기

윤두수ㆍ김명원이 장사 400명을 뽑아 고언백(高彦伯) 등을 시켜 인솔하게 하고 능라도(綾羅島)로부터 강을 조용히 건너 적진을 기습,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300여필의 말을 빼앗았다. 그러나 조금 뒤에 여러 둔의 적이 이르러 아군이 물러나 배를 타려 하나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적이 중류(中流)에 박두하는 것을 보고 배를 대지 못하자 많은 수가 익사하였다.
남은 군사가 왕성탄(王城灘)으로 어지럽게 건너오자 적은 비로소 그곳의 물이 얕아 건널 수 있음을 알고 모두 건너니 이곳을 지키던 군사는 화살 하나 쏘아보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윤두수 등은 전세가 불리함을 감지, 먼저 성중 사람들을 내보내고 무기를 풍월루(風月樓) 연못 가운데에 버리고 성을 빠져 나왔다.

제2차 싸움은 1592년 7월에 있었다. 조선의 원군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요동수비병 3,000명으로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조승훈은 북로 (北虜)와 여러 번 싸워 이겨 공을 세운 경험이 있어 일본군을 가볍게 본 데다가 평양에는 일본군의 수가 적다는 말을 듣고 순안(順安)을 떠나 평양성 밖에 이르러 도원수 김명원이 거느린 3,000명의 병사와 합세,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7월 15일 평양에 도착한 조승훈은 비바람이 심한 야간을 이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이때 일본군은 평양성문을 열고 유도작전을 써서 명군과 조선군을 성내로 유인, 성 안에서 조총으로 기습공격하여 악전고투하다가 유격장 대조변(戴朝弁)ㆍ사유(史儒) 등이 전사하자 많은 사상자와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퇴각하였다.

이어 제3차 싸움이 1592년 8월에 벌어졌다. 도원수 김명원은 일본군이 평양에서 더 이상 북진하지 않고 약해졌다는 보고를 받고 이원익ㆍ이빈(李賓)으로 하여금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조방장(助防將) 김응서(金應瑞), 별장(別將) 박명현(朴命賢) 등이 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20여 둔으로 나누어 평양 서쪽으로 압박하고,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를 점거하였으며, 별장 임중량 (林仲樑)은 2,000명을 거느리고 중화(中和)를 지켰다. 세 길로 나누어 진격, 보통문(普通門) 밖까지 육박하여 적의 선봉과 싸워 다소의 전과를 올렸으나 곧 적의 대군이 밀어닥쳐 패퇴하였다.10월에는 다시 관군과 승군(僧軍)이, 11월에는 승군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계획으로만 그쳤다.

평양성탈환도

그 뒤 제4차 싸움이 1592년 12월에 있었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의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칠성문(七星門)ㆍ보통문ㆍ함구문(含毬門)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쳤다. 이에 조선의 이일(李鎰)ㆍ김응서의 군대와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여 오유충(吳唯忠)ㆍ사대수(査大受)와 승군은 모란봉(牡丹峰), 양원(楊元)ㆍ장세작(張世爵)은 칠성문, 이여백(李如柏)ㆍ이방춘(李芳春)은 보통문, 조승훈ㆍ낙상지(駱尙志)는 이일ㆍ김응서와 함께 함구문을 공격하게 하고, 제독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며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고 사기를 북돋웠다. 이때 일본 장수 고니시는 쫓겨 연광정(練光亭)의 토굴에 들어가고 칠성문ㆍ보통문ㆍ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죽을 힘을 다할 것을 염려하여, 성 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ㆍ무기가 다하여 없어지고 원군도 오지 않아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에 고니시는 밤중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ㆍ황주(黃州)를 거쳐 다음날 봉산(鳳山)에 이르니, 이곳에 둔진하였던 일본군은 미리 도망하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계기가 된 전투였다.

해정창전투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이 일본 장수 가토(加藤淸正)의 군사와 해정창에서 벌인 전투이다. 장소(藏所)의 싸움이라고도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북침을 계속, 그해 9월 가토의 군대가 함경북도지역을 침입, 마천령을 넘어 해정창에 쳐들어오자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은 육진(六鎭)의 군대와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의 군사를 합쳐 도합 1, 000여명을 거느리고 일본군을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는 북도병(北道兵)의 선전(善戰)으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듯 하였으나 북병사의 성급한 전투진행으로 도리어 그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패전하고 부령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전사하였다.

한극함은 군사를 거두어 재 위에 진을 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싸우려 하였으나 짙은 안개를 이용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다시 패하였다. 한극함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가 종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싸움이 있은 지 5일 후에 일본군에게 회령을 점령당하자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에 의하여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결박되어 가토 진영에 넘겨졌다. 해정창은 성진시(城津市)로 비정된다.

연안성전투

임진왜란 때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의병을 이끌고 연안성(延安城)에서 구로다(黑田長政)의 군대를 맞아 싸워 크게 이긴 싸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조참의로 재직한 이정암은 선조가 서행(西行:피난)을 단행하자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왕을 뒤쫓아 개성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해직된지라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는 아우 정형(廷馨)과 함께 개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개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연안으로 들어갔다.
전일 부사로 있을 때 유애(遺愛)가 있어 부민(府民)들이 모여들었고, 조종남(趙宗男) 이하 수십 명이 창의할 것을 권하였다. 이정암은 권고를 즉각 받아들여 약서책(約誓冊)에 의병자원자의 성명을 적고, 1592년 8월 초순경에는 의병조직을 끝냈다.
왕세자로부터 초토사의 임명을 받은 이정암은 의병약속(義兵約束)으로,

①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
② 민간에게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
③ 주장(主將)의 일시의 명령이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
④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
⑤ 처음에 약속하였다가 후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
⑥ 논상할 때 적을 사살한 것을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
⑦ 적의 재물을 얻은 것은 전부 상금으로 준다.
⑧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아니한다는 8개항을 제시한 뒤 연안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500여명의 의병을 조련(操鍊)시켰다.

8월 22일 입성할 때 성안의 민가는 모두 비어 있었으나 성을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갔던 사람들이 속속 들어왔고 도망하였던 부사도 돌아왔다. 그러나 입성한 지 채 5일이 안되어서 해주에 본거지를 두었던 일본장군 구로다가 5,000 ~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국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대패하여 무수한 인명피해, 병기ㆍ군량 등의 손실을 보았다. 초토사 이정암은 대첩의 상보(詳報)를 올리지 않고 단지 “모일(某日)에 성을 포위하였다가 모일에 풀고 갔다(某日圍城某日解去)”라는 여덟 글자만 행재소에 전하였으나, 사실이 곧 알려지게 되어 초토사 이하 유공 장병에게 상직(賞職)을 주고 특히 이정암은 본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연안대첩으로 연안 이북 연해 10여읍 유산민(流散民)들이 각기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고, 도피하였던 수령들도 본읍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단절되었던 양호(兩湖) 명맥이 이 연안성을 통하여 행재소와 내왕할 수 있었다.

부산해전

1592년 4얼 13일 일본의 침략이 있자 당시 경상도의 해안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 박홍(朴泓)은 도망쳐 버렸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수사 원균도 패주, 도망해 버리자, 수군 만여 명이 모두 해산하였다.
이처럼 수군이 스스로 무너진 것은 왜군의 상륙을 용이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율포만호 이영남(李英男)과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이 원균에게 이곳을 버리면 전라, 충청도도 위태로울 것이라고 항의하면서 호남의 원병을 청해서라도 사수할 것을 역설하였다

.

경상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휘하 장수를 소집하여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찬반 양론이 제기되었으나 이순신은 경상도로 출병을 결정하였다. 전라도 수군은 부산포로 오는 도중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으며, 9월 1일 가덕도 북방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향하였다. 이때 적들은 부산진성 동쪽 산의 언덕에 삼군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함의 수는 470여 척이나 되었다.

그러나 통분할 일도 있다. 그것은 적군 속에 부역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9월 1일 하루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승전한 아군은 계속 적을 토벌하려 했으나 중지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군은 기병을 가진 반면 우리 수군은 군마를 갖지 못하였으며, 병력의 숫자도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장기간에 걸친 항해에다 종일토록 항전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피로하여 육지에서 전투하기가 어려웠으며, 날도 저물었기 때문이었다.
9월 1일 가덕도로 되돌아와 밤을 새고, 다음날 연합함대를 해체하고서 이순신의 전라수군은 여수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에 부산포 해전은 막을 내렸다.

부산포 해전은 숫적으로 우리 함대의 수가 적에 비해 3분의 1밖에 안 되었으며, 또 적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에게는 아주 불리한 여건이었다.
아울러 부산포 해전은 병사들이 오랜 항해로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한 전투로서 임진왜란 해전 중에서 대승을 거둔 승첩 중의 하나였다. 사실 부산포 해전은 전술적으로 적군을 사살하기보다는 적선을 깨뜨리는 데 주력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한 대첩이었다.
이 전투 이후로 일본의 수군은 거의 대부분 와해되고 말았다. 특히 부산포 해전은 전라수군과 경상수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는 데도 의의가 크다.

진주성전투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큰 전투이다.

제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또한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진주성의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ㆍ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명을 동원,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ㆍ창원ㆍ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와 같은 적정에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명밖에 없었다.

10월 5일 적의 선봉 1,000여 기(騎)가 진주 동쪽 마현의 북봉에 출현하자, 김성일은 남녀노소까지 동원, 무장시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일 적군은 3분하여 1대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 산 위에 진을 치고 성을 내려다보며, 1대는 개경원(開慶院)으로부터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앞에 진을 치고, 또 1대는 향교 뒷산에서 똑바로 순천당을 지나서 봉명루 앞에 있는 적군과 합세하였다. 이들 조총수들은 성안을 향하여 총포를 난사하며 초막을 짓고, 밤에는 불을 피워 기세를 올렸다. 그날 밤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을 보내어 의병 200여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들고 뿔피리〔呼角〕를 불면서 적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7일 적은 종일 총탄과 화살을 발사하였고, 8일에는 공격용의 죽제(竹梯)와 3층이나 되는 산대(山臺:飛樓)를 만들어 침공하여왔다. 이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거나 적이 성못〔城濠〕을 메우기 위하여 수집한 솔가지와 죽제를 짚으로 묶은 화약에 불을 붙여 성밖에 던져 불사르고, 또 이동하는 산대도 자루가 긴 도끼와 낫으로 파괴하면서 적을 무찔렀다.
또한, 고성의 임시현령 조응도(趙凝道)와 진주의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은 야음을 이용하여 군사 500여명을 이끌고 와서 진현(晉峴)고개 위에 올라가서 적을 위협하였다.

9일에는 성밖에 머물러 있던 합천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정기룡(鄭起龍)ㆍ조경형(曺慶亨)이 일본군과 대결하였으며, 의병장 최경회(崔敬會)ㆍ임계영(任啓英)이 구원병 2,000여명을 이끌고 와서 적을 견제하였다. 10일 사경초(四更初)에 적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하여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라오려고 하였으며, 그뒤에 기병 1,000여명이 조총을 난사하면서 돌진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활ㆍ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질藜砲)ㆍ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 끓는 물과 짚에 불을 붙여 던지기도 하면서 사력을 다하여 적의 공격을 무찔렀다.

한편,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고,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하여 많은 적을 살상하고 무찔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었다.

제2차 전투는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10일간 계속되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 일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 의한 패전을 설욕하고, 한편으로는 강화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자는 목적으로 다시 진주를 공격하여왔다. 이때 명나라는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회피하고,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전라순찰사 권율(權慄) 등이 조정의 명으로 의령에 도착하였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발분하여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가 앞서 입성한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과 합세하고, 이어 의병장 강희열(姜希悅)이 도착하였다. 이때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고, 일반 성민은 6만 ~ 7만명이나 되어 적의 대군과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거기에다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명장접대차사원(明將接待差使員)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적의 소식을 듣고 진주로 급히 돌아와 미처 조처를 취할 여유도 없었고, 김천일이 지휘를 담당하니 주객(主客)간에 어색한 점도 많았다.

적은 6월 21일 진주성을 포위하고, 22일부터 본격적인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성안에서는 부대를 편성하여 구역을 나누어 성을 지키고, 황진ㆍ이종인ㆍ장윤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응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25일 적은 동문 밖에 흙을 모아 높은 언덕(土山)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土屋]을 지어 성을 내려다보고 탄환을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성안에서도 민중들의 협조를 얻어 높은 언덕을 마주 만들어 거기서 현자포를 쏘아 적굴(敵窟)을 격파, 항전하였다.

26일 적은 목궤(木櫃)에다 생피(生皮)를 두르고 이로써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자성(子城)을 헐기 시작하였다. 성위에서는 큰 돌을 굴려 내리고 화살을 내리퍼부었다.
27일 적은 다시 철갑을 두르고 철추(鐵椎)를 사용하여 성을 헐기 시작하였다. 이종인이 뛰어난 완력으로 연달아 적 5명을 죽이니 적은 잠시 물러갔다. 적은 성의 밑뿌리를 파서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고, 성안에서는 이를 막는 데 사력을 다하였다. 적의 시체는 성 밖에 삼대[麻]와 같이 깔려 있었지만, 적은 단념하지 않았다.
28일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황진은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장수들은 동분서주하며 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29일 적은 소가죽[牛皮]을 여러 장 덮은 구갑차(龜甲車)를 동원하여 동문 성벽 밑에 접근하고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하였다. 이종인은 군사와 더불어 활을 버리고 창과 칼로써 처참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김천일ㆍ고종후ㆍ최경회 등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북향재배한 뒤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한편, 이종인ㆍ김준민ㆍ이잠(李潛) 등은 성안에 있는 남녀들과 칼을 휘두르며 시가전〔巷戰〕을 폈으나 역부족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종인은 죽을 때 양쪽 겨드랑이에 적 1명씩을 끼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사하였다. 또한, 의비 논개(論介)가 촉석루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적은 비록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로 인한 손실도 막대하여 더 이상 전진하지도 못하고 철수하였다.

행주산성전투

1593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일본군을 대파시킨 전투이다.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이치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관군과 명군이 평양을 수복, 남진을 속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관군을 이끌고 북상,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관군을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설진(設陣)할 것을 원하였으나 막하 장수들의 반대로 조경이 물색한 곳으로 결정하였는데, 이곳이 행주산성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조경으로 하여금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은밀히 군사를 이곳으로 옮긴 뒤 휘하병력 가운데서 4,000명을 뽑아 전라도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여 서울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행주대첩 기록화

이때 죽산에서 패한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도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양천에 주둔, 행주산성과 금천 중간위치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도록 하는 한편 만약의 사태에 대비,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친 권율을 돕도록 하였다. 권율은 남은 병사를 이끌고 조경 등과 함께 행주산성에 설진, 이때 승장(僧將) 처영(處英)도 승의병(僧義兵) 1,000명을 이끌고 옴에 따라 이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후 권율이 정예병을 뽑아 서울에 보내어 전투태세를 갖추자, 적장들은 이치와 독산성에서 치욕적인 대패를 경험한 지라 일거에 아군을 멸하여 위험을 배제하자는 결의로 임하였다.

이에 이번 출정까지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던 우키타(宇喜多秀家)를 총대장으로 이시다(石田三成)ㆍ마시다(增田長盛)ㆍ오타니(大谷吉繼) 등을 세 봉행(奉行:통치자 將軍을 보좌하던 최고무관직)으로 하여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누어 전 병력은 3만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여 왔다.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로는 궁시(弓矢)ㆍ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로 적의 침공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아군의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일시에 몰려올 것에 대비하여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고 토제(土堤)를 쌓아 조총탄환을 피할 수 있게 하였고, 병사에게 재[灰]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하였다.

일본군이 내침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은 성안의 모든 병사들에게 이번 일전(一戰)이 생사도 중요하지만 국운이 이 한판싸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주지시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593년 일본군의 선봉 100여기(騎)에 뒤이어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대군이 밀려왔다.

그는 평양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싸움에도 참전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설욕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제일 앞서 공성(攻城)에 나섰다. 그러나 성 안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ㆍ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强弓)의 시위를 당기니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맞아 혼비백산하니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상태에 빠져 물러갔다.

이어 이시다가 인솔한 제2대도 공격에 실패하였다. 다음은 제3대의 군이 달려들었는데,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전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어 장제(長梯)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총수(銃手) 수십명을 올려놓고 성 안을 향하여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졸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트리고 또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달아 쏘게 하니 맞는 자는 즉사하였다.

제1대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연패하는 전투상황을 지켜보던 적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하여 선두에 나오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전진, 마침내 제1성책(城柵)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하자 관군은 한때 동요하였으나 권율의 독전으로 이를 극복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사격되어 우키다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퇴진하였다. 그리고 이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 역시 부상으로 후퇴하였다.

제5대장 요시카와(吉川廣家)는 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으로 성책의 일부를 집중 발사, 불이 붙게 하였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버리고 시석(矢石)을 퍼부어 그는 큰 부상을 입고 퇴각하니 그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하였다.

이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 두 장수는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공격을 가하여 왔다. 이때 처영의 승의군도 용감히 맞서 싸웠는데, 이들은 차고 있던 재[灰]를 적군에게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바꾸어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의 일각을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자 승의군이 동요하기 시작, 급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때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자 승의군은 다시 돌아서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한편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으로 맞섰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며,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적이 이것을 알고, 기세를 올리려 하였으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濱)이 수 만개의 화살을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이니 적은 당황,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성내의 관군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추격하여 적의 목 130급(級)을 베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는데, 아군측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冑)ㆍ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 노획물 가운데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고,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 이상에 달하였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명(明)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이 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대첩이 있은 다음 권율은 휘하병력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본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 뒤 김명원의 뒤를 이어 도원수가 된 것은 행주대첩의 전공이 많이 작용된 것이라 하겠다.

진주성 2차전투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우키다 히데이에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 반성, 의령을 점령하고, 19일 3만 7000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진주성전투에서 귀갑차를 이용 공격하는 가토 - 태합기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의병장 고종후, 이계련, 민여운, 강희열,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이끈 3,400 병력과 6 ~ 7만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투는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조선군이 불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몇날 며칠 동안 내린 비에 성벽일부가 무너졌다. 성안으로 돌입한 왜군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 관, 민 6만을 사창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

칠천량해전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한 해전이다.

임진왜란ㆍ정유재란중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일본군은 다시 조선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 섬멸하고자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하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하여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무모한 출전으로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와 본인은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로 하여금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선(戰船) 수 십척을 상실하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재출전을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기 위하여 삼도수군 160여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 7월 14일 부산 근해에 이르자, 이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을 하다가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명을 잃고 칠천량(지금의 거제군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상태에 있었다.

이때 적은 조선수군에 대한 기습계획을 세워 도도(藤堂高虎)ㆍ와키자카(脇坂安治)ㆍ가토(加藤嘉明) 등 수군장수들은 7월 14일 거제도 북방으로 이동한 뒤 15일의 달밤을 이용하여 일제히 수륙양면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령(將領)들은 응전하였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분파(焚破)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 수군의 장수들이 전사하고,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植)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고, 오직 경상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방면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수군이 일시에 무너지고 적은 남해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서해로의 진출이 가능하였으며, 우키다(宇喜多秀家)ㆍ고니시(小西行長)ㆍ모리(毛利秀元) 등이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여 겨우 살아나온 김식으로부터 패전의 보고를 접하게 되자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남원성전투

정유재란중 1597년(선조 30) 8월 13일에서 16일까지 남원성에서 벌어졌던 전투이다.

당시 아군은 부총병 양원(楊元), 중군(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 모승선(毛承先)ㆍ장표(蔣表) 등이 거느린 명군(明軍) 3천명과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남원부사 임현(任鉉),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이 거느린 관군 1천인을 합하여 4천인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키다(宇喜多秀家)ㆍ고니시(小西行長)ㆍ하치스타(蜂須賀家政)ㆍ시마스(島津義弘)ㆍ가토(加藤嘉明) 등이 거느린 5만6천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1597년 7월말경, 일본군의 대병력이 북상하자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호남의 관문인 남원에 병력을 집결시켜 이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이에 양원으로 하여금 명군 3천인을 이끌고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임현과 함께 남원에 가게 하고, 또 유격장(遊擊將) 진우충(陳愚衷)으로 하여금 전주를 지키면서 남원전투를 돕게 하였다.

같은 해 8월 6일에는 이원춘이 남원성에 들어왔으며, 8일에는 문안사(問安使) 오응정이 그대로 남아서 방어사를 겸하였다. 이어 12일에 이복남이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別將) 신호(申浩) 등과 합세하여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원성에 들어왔다. 13일에는 고니시의 주력부대가 도착하니 양원은 이신방과 함께 동문을 지키고, 모승선은 서문, 장표는 남문, 이복남은 북문을 각각 지키게 하였다.

전투는 이날 밤부터 시작되어 16일에는 성이 함락되었다. 남문을 돌파한 일본군과 대혼전이 벌어져 이복남ㆍ이신방 등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전사하였고, 양원만이 겨우 성을 탈출하였다.
한편, 전주성의 진우충은 남원에 구원병을 보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남원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성을 버리고 달아남으로써 일본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를 무혈(無血)로 점령하였던 것이다.

황석산성전투

정유재란 때 경상도 안음현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왜군과 벌인 전투이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다시 조선을 공격하였다. 1597년(선조 30) 8월 16일 가토(加藤淸正)ㆍ구로다(黑田長政) 등 적의 맹장들은 황석산성에 도착하여 수만의 군사로 성을 공략하였다.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길목이 되므로 왜군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라 여겨, 주위의 군사를 예속시켜 안음현감 곽준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때 적군이 공격해 오니 곽준은 수성(守城)의 계책을 세우며 성을 보수하는 등 전력을 다하였다. 성 안에는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이 백성들과 합세하여 성을 지킬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적들은 성을 포위하여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성 안에서는 곽준ㆍ조종도를 비롯한 장수들과 백성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사림은 가족을 성 밖으로 피신시킨 뒤 성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ㆍ이후(履厚)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왜군은 고전 끝에 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성 안을 수색하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뒤이어 왜군은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진안현을 거쳐 전주로 빠져서 좌군과 합친 뒤 전주성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는 비록 실패하여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으나,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의 정신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명량해전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울돌목)에서 대파한 해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대부분 패하고 말았으며, 그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으나 남아 있던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고 있었으며, 육군의 육상진출과 더불어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하여 이진(利津)ㆍ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명랑해전도 - 해군사관학교

일본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우리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정(敵情)을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15일 조선수군을 우수영(右水營: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수군은 명량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망군(望軍)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여 일본수군의 수로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전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緘) 등을 불러들여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전류하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수군에 비하여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으며,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분포로 인하여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

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다."라고 외치므로 이순신은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기(戰機)를 잡은 조선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령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수군은 퇴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서해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쇄(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

울산도산성전투

정유재란 때에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중심으로 조선ㆍ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이 펼쳤던 전투로, 1차와 2차전으로 구분된다.

제1차 전투는 1597년(선조 30) 12월 22일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1596년 왜와의 화의교섭이 깨어지자, 도요토미(豊臣秀吉)는 이듬해 1월 재침하게 하였다. 그때 아군은 적의 재침에 대비하여 군을 정비하고 있었다. 적군은 좌군ㆍ우군으로 나누어 경상도를 침략하고는, 전라도를 제압하여 충청도 방면으로 북상하려 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자 명군도 내원(來援)하였다. 아군은 각지에서 분전하고 적을 격파한 바 있었지만, 왜군은 직산(稷山)전투에서 조선ㆍ명나라 군에게 대패당하고 직산에 있던 적군도 상주까지 진출하였던 가토(加藤淸正)군과 합류하여 울산ㆍ서생포(西生浦) 방면으로 후퇴하고는, 울산 도산성을 축조하고 고수하였다.
이에 명장(明將)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4만4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5만여 명의 군사와 합세하여 조령을 넘어 울산으로 향하였다.

울산 도산성전투도

양호는 먼저 사병(詐兵)을 보내어 순천방면을 치는 체하여 좌군의 고니시(小西行長)군을 견제하였다.
아군은 경상좌병사 고언백(高彦伯), 경상좌수사 이운룡(李雲龍),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 등 제장이 참가하였는데 권율은 이운룡으로 하여금 함정을 정비, 서생포방면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어 도산성에 대한 포위공격이 시작되었다.
포격과 화공으로 공격한 지 10여일 격전이 전개되고, 적은 군량이 떨어지고 사상자가 증가하였으며, 아군은 적의 수급(首級) 661급을 취하기도 하여 승리를 잡은 듯 하였으나 그 뒤 서생포에 주둔하던 왜군과 서남방에 있던 왜군이 지원해 와 쌍방간에 격전이 전개되었다. 때마침 큰비로 인마(人馬)가 많이 동사(凍死)하고 사태는 점차 불리해 짐에 따라 조ㆍ명 연합군은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1월 4일, 경주로 철수하였다.

제2차 전투는 1598년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되었다. 제1차 전투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는 2만4000여 명의 동정군(東征軍)을 인솔하고, 조선측에서는 별장 김응서(金應瑞)가 5,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21일 경주에서 출발하였다.
김응서는 먼저 동래의 적군을 격파하여 울산과 부산간 적의 연락선을 차단하였다. 명나라 해생(解生)의 군사가 먼저 도산성을 공격하고, 이어 마귀가 2만명의 군사로 공격하였다.
쌍방의 유인ㆍ기습 등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ㆍ명연합군은 25일에 이르러서는 적에게 크게 타격을 주고 조선사람으로 적중에 잡혀있던 1,100여명을 구출하기도 하였으나, 명나라의 마귀는 이때 명나라군이 사천성에서 패전하였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군사를 철수하였다.

예교성전투

1598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조명 연합군이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섬멸하기 위해 육해상으로 부터 공격한 전투로 왜교성(倭橋城)전투라고도 부른다. 이 전투는 광양만과 해룡면 일대의 육해상에서 펼쳐진 임진왜란 막바지 최대의 결전이었다.

1597년말, 조명연합군의 울산 도산성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명나라 경리 양호는 군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일본군을 공략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군문 형개가 동의하면서 삼로병진 전략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98년 3월에는 조선 조정에 세갈래로 군을 나누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통보가 전해졌고, 얼마 후 수군까지 더해져 사로병진 작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동로군의 '마귀'는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에게, 중로군의 '이여매'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하면서 공격이 더뎌지게 되었다. 서로군이었던 '유정'과 수로군이었던 '진린'은 왜교성에 주둔 중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유정은 처음부터 예교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자 하지 않았다. 싸움보다는 고니시를 유인하여 생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9월 20~22일까지 수로군과 합동으로 예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소극적인 공격으로 수로군만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서로군은 다시 10월 1일 예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진린의 수로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음에 반해 유정은 다시 소극적인 태세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중로군이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유정은 철군을 하고 말았다. 진린의 수로군만 피해를 입고 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예교성 전투에 대해서 ‘난중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0월 2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예교성을 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했지만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청일 등이 총에 맞에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 등이 총상을 입는 피해가 있었다.
3일에도 연합함대가 출진하여 해상 공격을 계속 했는데, 썰물로 갯벌에 갇힌 진린의 사선 19척, 호선 20여 척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손실되고 수백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수군이 구원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염려하여 우리 전선 7척을 투입해 같이 갯벌에 걸리게 했는데, 우리 전선의 선체가 높고 튼튼하며 선상에서 화살을 쏘아대며 일본군의 접근을 막아 다음 조수 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진린은 4일에도 연합함대를 이끌고 공격을 계속했으나, 유정의 육군이 호응하지 않아 효과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진린은 직접 유정을 찾아가 항의하였고 두 지휘관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더욱이 유정이 6일 예교성의 포위를 풀고 부유창으로 퇴각하자 서로군과 수로군은 서로 단독 작전을 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린은 다른 명나라 장수처럼 조선 수군의 일본군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대국 수군의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조명 수군이 합동 작전을 펼칠 때마다 이순신의 조선군보다 전공에서 뒤지는데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진린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주었으나 일본군에 대한 공격만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진린은 이순신의 무인으로서 의지와 기개에 감명을 받아 이후 적극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말을 수용하고 함께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진린이 훗날 선조에게 ‘이모(李謀)는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라고 극찬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이순신과 진린 제독은 육군으로 예교성을 고립시키고 지구전을 벌여 일본군을 피곤하게 한 다음 다시 수륙 합공을 하자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고니시가 철군할 경우 해로를 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을 예상해 적극적으로 예교성 주변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철군을 계획하던 고니시는 조명연합 수군이 바다를 막자 유정을 다시 매수하였고 남해안 주변의 일본군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로써 조일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노량해전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麟)이 이끄는 조ㆍ명연합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임진왜란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노량해전도 - 해군사관학교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던 중 다음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고니시는 수륙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어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하여 남해ㆍ부산 등지에 있는 그들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ㆍ명연합수군을 협격하면서 퇴각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한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하여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이 예견한 대로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하여 협격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ㆍ명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전투태세에 들어가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독전하자 200여 척의 왜수군이 분파(焚破)되고 패잔선 50여척이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로 마지막 도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자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퇴하였으며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본문 책임자, 최종수정일

본문 유틸리티

  • 인쇄하기

본문 만족도 조사

콘텐츠 만족도 조사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 만족도에 대한 평가와 글을 남겨주세요.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