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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

진주성 포루

김덕령 장군이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된 사연

전라도 광주 일대에서 효자로 소문난 김덕령(金德齡)이 스물두 살 때였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당시 경상도 진양땅 자매실(지금의 수곡면 자매리 자매 마을)에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김덕령은 밤새 삼백 리 길을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러나 명의는 "광주로 가려면 닷새나 걸리는데 당신 어머니는 워낙 위중해 내일이면 죽을 것이오." 하면서 도와주기 어렵다고 하였다. 김덕령은 그 말에도 명의를 계속 설득했고, 김덕령의 효심에 감동한 명의는 결국 같이 가겠다고 했다. 김덕령은 명의를 안고 말을 타고는 호랑이처럼 달려 다음날 정오에 집에 닿았다. 명의의 처방을 받은 김덕령의 어머니는 중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명의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진주로 달려왔다. 그리고 자매실 앞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무찔러 은혜를 갚았다. 자매마을 서쪽 문서골에는 그 명의의 의서(醫書)와 침을 감추어 둔 것으로 전해지는 당새기 바위가 있다. 그 명의의 이름은 김남(金楠), 혹은 유이태(劉以(爾)泰)라고 한다.

자매마을의 복지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쌓은 성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금산면 월아산 장군대에도 목책을 쌓아 진을 친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고, 1978년 월아마을 입구에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다.

현재 송곡마을 전경

금곡면에 전해오는 임진왜란에 관한 설화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으로 떠나는 장졸(將卒)들에게 "조선에 가면, 반드시 송자(松字)를 피해라."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 장졸들은 송자(松字)가 들어간 지명을 피해 갔다. 선발 부대가 지나가며 송(松)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나 산에는 깃대를 꽂았다.

이 덕분에 임진년(1592년)에 진주성 대첩을 겪고, 계사년(1593년)에 진주성이 함락되는 와중에서도 진주시 금곡면 송곡(松谷) 마을만은 유일하게 전화(戰禍)로부터 안전하였다. 일본군이 송(松)자를 두려워하며 피했던 이유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주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씨에 관한 설화

함안(咸安)에 조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다른 특별한 재주는 없었으나 돌팔매질은 아주 잘하였다.

매일 밥을 먹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는 나무를 한 짐 해 놓은 뒤, 산에서 돌팔매질 연습을 하곤 하였다. 처음에는 잘 맞지 않았으나 매일 반복하여 연습한 결과 맞히지 못하는 게 없는 실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돌팔매질 실력을 보고는 포수의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칭찬을 하였다. 조씨는 나무를 하고는 돌팔매질로 새나 산짐승을 잡아 홀어머니의 반찬으로 만들어 봉양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씨도 어머니를 모시고 진주성으로 피란을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였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씨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은 없으나 돌팔매질이 워낙 정확하여 왜군을 향하여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던지는 돌마다 정확히 적군을 맞혔다. 하나둘씩 적군은 쓰러졌고 적들은 그의 돌팔매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돌팔매에 맞은 적군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왜군을 물리치는 데 조씨도 일조를 하여 유명해졌고, 오늘날까지 조씨의 돌팔매 솜씨가 전설로 전해진다.

운주당

진주시에 전해오는 관인 발견 유래담

1747년(영조 23) 남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 어부가 철인 하나를 건졌는데, 앞면에는 '慶尙右道 兵馬節度使印(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萬曆 十三年 月 日造(만력 13년 월 일조)'라 새겨져 있었다. 당시 병사 최진한(崔鎭漢)은 이 사실을 조정에 장계로 올리면서 이것이 1593년(선조 26)에 순국한 최경회의 직인이라고 증언하였다.

영조는 이 철인을 보고 몹시 감격해하며 동으로 인갑을 만들고 친히 관인명을 은으로 발라 진주 본영으로 보내며 잘 보관케 하였다. 이후 이 철인은 진주영의 보장물이 되었는데 영중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밤에 울었다고 한다. 1839년(헌종 5) 운주당(運籌堂)이 실화로 불탔을 때 병사가 불에 타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잿더미 속에서 되찾을 수 있었고, 1899년(고종 36) 속칭 환갑(還甲)불이 났을 때도 운주당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철인만은 중건 때 다시 찾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내단에 관한 전설

기계면과 신광면 경계의 내단, 내단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고개를 넘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약 300여년 전 최국일, 박충국 두 선비가 지금의 내단리를 지나다가, 마침 날은 저물고 산세가 험한지라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먼 길을 걸어온지라, 두 선비들은 금새 잠이 들었고, 기이하게도 이들 두 사람은 서로 똑같은 꿈을 꾸게 되는데 꿈의 내용인즉, 두 사람은 붉은 언덕을 넘어 좋은 집터를 얻게 되고, 그 땅 위에 좋은 집을 지어 잘 살게 되는 내용의 꿈이었는지라, 잠에서 깨어난 두 사람은 서로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다가 이곳에서 전착하기로 했다.

그 뒤 임진왜란때 건넛마을 사람들이 마적을 피하여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함에 따라 큰 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벙어리와 염탐꾼 설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의 일이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칠 야심을 품고 염탐꾼을 잠입시켜 방방곡곡을 염탐하게 하였다. 그런데 안동 지방에 왜놈 염탐꾼이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어허, 심상치 않는 일이군."

곁에 있던 유서방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김노인, 왜 그러십니까?"
"아무리 봐도 왜국 사람임에 분명해."
"예, 왜놈이라구요?"

유서방의 아내도 일손을 놓고 참견했다.

"왜국사람이, 왜 우리 고장에 왔나요?"
"염탐하려고 온 것 같아."
"염탐이라뇨?"
"우리 말이 서투를 뿐 아니라 자기의 짐을 지고 멀리 남해 일대를 돌아다닐 건장한 사람까지 구하더군."

노인의 안색이 변하자 유서방 내외도 불안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내 추측이 분명해. 왜놈이야."

부인이 깜짝 놀라며 남편을 쳐다보자 남편도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서렸다.

"왜놈이라면, 노인의 말이 맞을 거예요. 얼마 전에도 왜놈이 우리 고장을 지나갔단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 심상치 않군요."
"암, 자칫하다간 왜놈들에게 나라까지 빼앗길 우려가 있어."
"그렇다면 그놈의 행동을 감시하여 음흉한 속셈을 막아야 합니다."

유서방이 주먹을 불끈 쥐자 아내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막지요? 관가에서도 뚜렷한 증거가 없어 잡질 못하니 그렇게 마음 놓고 돌아다니지요."
"아냐, 내가 미행해야지."
"아니, 당신이 어떻게......"
"벙어리가 되어 따라 다니면 놈은 마음 놓고 날 대할 거요."

노인은 유서방의 묘책에 고개를 끄떡였다.

"과연 좋은 생각일세. 자네를 놈에게 데려다 줄 테니 잘 해보게."
"예"

유서방은 결심을 한 다음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염탐꾼의 물음에 유서방은 벙어리 흉내를 냈다. 염탐꾼은 처음에는 벙어리라고 꺼려하다가 노인의 말에 오히려 벙어리가 좋다고 좋아했다.
그날부터 유서방은 벙어리 노릇을 하며 염탐꾼의 동정을 살폈다. 그들은 며칠이 지나 남해 해안에 당도했다. 염탐꾼은 남해를 두루 돌아다니며 지도를 자세히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염탐꾼은 유서방을 데리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염탐꾼은 자기의 소임을 다한 듯 기분 좋게 술을 잔뜩 퍼마신 다음 잠자리에 떨어졌다. 이 때 유서방은 염탐꾼이 그린 지도를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육지와 바다 그리고 강, 마을 등을 자세히 그렸다. 전략상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 (내가 이걸 본 이상 내버려 둘 순 없지. 바다를 육지, 육지를 바다로 고쳐 그려 놓으면 나중에 혼선을 빚을 게다) 다음 날 염탐꾼은 유서방에게 제법 많은 돈을 주고 작별했다.
그로부터 몇 해 후 임진년, 왜적과의 치열한 해상전이 벌어졌다. 바다는 온통 왜적선으로 덮였다. 선두에서 배를 달리는 왜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지도를 펴라."

무장이 명령대로 지도를 폈다.

"여기 원 위치요."

한동안 지도를 보던 왜장이 무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저쪽으로 뱃길이 있구나. 이순신의 전함이 너무 가까이 오면 이쪽으로 빠져나간다."

해상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모두들, 날 따르라."

왜선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도에 나타난 대로 이락포에서 설천면 비란리 사이가 파랗게 되어 바다로 이어지는 줄 알았다. 그들은 이락포에서 지금의 가철리 쪽으로 나가려 했으나 그곳은 육지로 막힌 곳이 아닌가. 왜장은 크게 당황했다.

"뱃길이 막혔다. 지도가 틀렸구나."

왜장은 화가 치솟아 지도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지도만 믿었다가 이순신에게 모두 죽게 되었다. 이리하여 한낱 농부인 유서방의 지혜로 인하여 수많은 왜적선을 침몰시키고 승전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경남 남해군 고현면 오곡리를 당시 지도에 파란 칠을 했다고 해서 가청리라고 부른다는 전설이다.

사명대사유적지

사명대사 설화

밀양 무안면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 진사 벼슬을 했는데, 아들 하나를 낳고 본처가 죽어 후처를 보게 되었다. 후처도 아들을 낳았는데, 전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하였다.

큰 아들은 어언 장성하여 장가를 가게 되었다. 후처는 자신이 시집올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미비 종을 은밀히 불러 첫날밤에 신랑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했다. 상전의 명이 지엄한데다 일을 성사시키면 종문서를 파주고 전답까지 떼어주겠다는 데 혹해, 미비종 노파는 그러마 약조하고 남편과 함께 장가가는 새 신랑을 따라갔다. 첫날 밤, 밤이 깊어 신랑 신부가 모두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종의 남편은 몰래 신방에 들어가 신랑의 목을 베어서는 항아리에 넣고 집으로 가져와 다락에 처넣어버렸다.

색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신랑의 목이 없었다. 놀랍고 비통한 중에 생각해 보니 신랑을 죽인 누명을 꼼짝없이 자신이 뒤집어쓰게 될 판이라, 색시는 식구들 몰래 그 길로 도망을 쳤다. 신랑 측에서 따라갔던 상객도 신랑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신랑 신부 단 둘이 자다가 신랑은 죽고 신부는 어디론가 사라졌으니, 이것은 분명 신부에게 간부가 있어 남녀가 공모하여 신랑을 살해하고 함께 도주했음이 틀림없다고 얘기하게 되었다.

자신의 소망대로 되었으므로 임진사의 후처는 약속대로 미비종에서 땅을 떼어주고 종문서도 파주어, 멀리 떨어진 곳에 가 살게 하였다.
색시는 어떻게든 내막을 수소문하여 신랑의 한을 풀고 자신의 누명도 벗으리라 결심하고 그로부터 방물장사를 하면서 본색을 감추고 전국 각처를 떠돌아 다녔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색시는 자식도 없이 늙은 내외가 단둘이 살고 있는 한 농가에 들어 하루를 묵게 되었다. 할멈은 떡방아를 찧으러 가고 영감은 낮잠을 자는데, 건넌방에서 바느질하고 있는 색시의 귀에 영감이 잠꼬대하는 고리가 들렸다. 가위에 눌린 듯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헛소리를 하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싶어 색시가 유심히 들어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였다.

색시는 영감이 누워 있는 방으로 건너가 영감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바른 대로 말하라고 을렀다. 겁에 질린 영감은 임진사 후처의 명으로 자기네 내외가 신랑을 죽였으며, 그 목은 항아리에 넣어 다락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실토했다.

정월 초하룻날인 그 이튿날, 색시는 마침내 시댁 동네를 찾아갔다. 본처와 아들의 산소에 다녀오던 임진사와 색시는 마침 길에서 마주쳤다. 색시는 임진사에게 큰 절을 올리면서 자신이 그 며느리임을 밝혔다. 그녀야말로 간부와 함께 아들을 죽인 원수라고 알고 있는 터라, 임진사는 그가 그런 며느리를 둔 바 없다고 단호히 돌아서는데, 색시는 한 마디만 듣고 가시라고 시아버지를 붙잡아 미비종 내외가 저지른 죄상을 소상히 아뢰었다.

임진사와 색시가 함께 집으로 가서 다락문을 열어보니 과연 명주 수건으로 동인 항아리가 있고, 그 안에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한을 품고 죽어 아직도 눈물을 머금은 채 색조차 변하지 않은 아들의 머리를 보고 임진사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였다.

색시가 미음을 끓여 시아버지께 올리고 있는데, 남편이 본처의 산소를 찾아간 데 속이 상해 가까운 친정에 갔던 후처가 돌아왔다. 색시가 절을 올리려 하자 후처는 우리 아들을 죽인 년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느냐고 악을 쓰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때 임진사가 머리만 남은 아들의 상투를 잡고 후처의 얼굴을 후려치며 누구에게 음해를 씌우려 하느냐고 호통을 치자 너무나 놀란 나머지 후처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임진사는 후처와 그 소생을 집안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근 다음 집 둘레에 짚동을 빙 둘러 세웠다. 많던 재산을 정리하여 반은 며느리에게 주고 나머지는 아들의 혼을 절에다 천도시키고 나서, 임진사는 집에다 불을 놓았다. 그리하여 후처와 그 소생들은 불에 타 죽었으며, 며느리도 이제는 남편의 한과 자신의 누명을 풀고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임진사는 그 길로 서산대사를 따라 입산했다. 그후 그는 수양정진하는 한편 무술을 연마하여 임진왜란이 났을 때 승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니, 그 임진사야말로 곧 저 유명한 사명대사이다.

성주사

성주사 설화

창원 성주역에서 동으로 오리 쯤 가면 신모사(神母寺) 기슭에 성주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을 일명 '곰절' 혹은 '웅신사'라고 한다. 신라 흥덕왕 때에 위군 십여 만이 내침하여 왕이 신하를 모아 이를 격퇴할 계책을 의논하며 닷새를 지냈으나 묘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왕의 꿈에 신이 현몽하였다.

"지리산에 있는 무량화상에게 물어보면 위군을 적퇴할 것이니라."

그래서 왕이 사자를 보내어 무량화상을 맞아 신모산에 오르게 하였다. 스님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세우고 왼손으로 배를 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갑옷 입은 신병들이 출현하여 주위를 둘러쌌다. 위군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도주해 버렸다고 한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국사로 모시고, 이 절을 창건하게 하여 성인이 상주하는 절이라 하여 성주사(聖住寺)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에 이 절에 중건할 때에 본래의 절터에 목재를 쌓아 두었는데 하룻밤에 곰이 대들보감을 지금의 절터에 물어다 놓아서 지금의 절터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성주사를 '곰절' 혹은 '웅신사(熊神寺)'라 고도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시락암굴과 정렬부인 설화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낙동 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해안의 절벽 밑에 암굴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시락암굴이다.
평소 7, 8명의 인원이 수월하게 들어앉을 수 있는 이 암굴은 만조 때가 되면 바닷물이 입구에까지 차 오르지만 그 이상은 더 물이 들지 않으며 옛날부터 난리가 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어 왔다.

옛날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어느 젊은 부부가 난을 피해 이 암굴에 와서 숨어 지냈다. 때는 마침, 해상의 도처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고가 한참 드높던 무렵이었다. 도망치던 왜적의 배 한척이 때마침 이 근방을 지나다가 문득 암굴 속의 인기척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번에 암굴을 수색하여 젊은 부부를 끌어낸 다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베어 죽이고 기절한 부인을 배에 싣고 달아났다.

얼마 후에 부인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자신은 적병들에 의해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부인은 이미 그나마도 뜻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총중에도 번번히 욕을 보이려고 달려드는 왜병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되었지만 부인은 안간힘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힘이 이 많은 짐승들을 어떻게 감당하랴, 장차 부인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왜적들은 번갈아 찾아와서는 한편으로는 얼르기도 하고, 혹은 힘으로 달려들어 꺽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틈을 주지 않고 반항을 하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곤 하였다.

그 날밤, 부인은 힘에 지쳐서 쓰러진 채로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뱃전에서 남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을 둘러보니 왜적들은 모두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이때 문득 부인의 머릿속에 한가닥 계책이 스쳐갔다. 부인은 자기의 몸속 깊이 지니고 있던 장도를 뽑아들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앉은 자리의 배 밑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왜적들은 오랫동안 패전에 심신이 모두 지쳐 있었으므로 실상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치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 부인은 다만 일심으로 손을 놀렸다. 오직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으리라는 서리 찬 집념 하나로 뱃바닥을 파들어 갔던 것이다.

이윽고 배 밑바닥에 쥐구멍 만한 구멍이 하나 뚫렸다. 부인은 계속 그 구명을 넓혀 나갔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일인데 이미 밤을 지나고 멀리 수평선위에서 희미하게 먼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구멍을 뚫는데 성공을 하였고, 그 구멍으로부터 바닷물이 펑펑 차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왜적들은 그제서야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으니 그들은 모두 아우성을 치며 뱃속을 우왕좌왕하다가 배와 함께 침몰되어 모두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한편 부인은 천지신명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큰 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논개묘

탑시기 논개묘 설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부락, 속칭 탑시기라는 곳에 잡초가 무성하고 흙이 허물어진 볼품없는 묘가 하나 있다. 이 무덤이 바로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은 논개의 무덤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논개는 주달문이라는 훈장의 딸로 태어났다. 논개의 아버지가 서당의 훈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논개는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며 행복하게 살았으나 논개가 십오세 깨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논개와 어머니는 숙부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으나 숙부집도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웠다. 그러자 숙부는 논개를 어떤 집안의 민며느리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눈치챈 논개와 어머니는 멀리 도망하였다. 이에 그 집안에서 장수 현감 최경회에게 상소를 올리어 두 모녀를 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장수현감은 논개와 어머니를 잡아다가 문초하던 중 사연을 듣고 보니 신세가 너무 가련하여 무죄 방면하였는데 모녀는 갈 곳이 없어 장수현감 부인에게 있을 만한 곳을 부탁하여 논개가 현감부인의 침방으로 있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에 몸이 약한 현감 부인은 논개의 됨됨이를 살피어서 현감의 부실로 삼게 하였다.

한편 세월이 흘러 민족의 비운인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최경회는 의병 육 천여명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떠났는데 이 때 최경회의 부실인 논개도 그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된 것이다. 진주성 싸움은 의병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왜병에게 강력하게 대항하였으나 워낙 수적으로 열세인데다가 그들의 신무기인 조총에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말았으니 최경회공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때 논개는 기생의 적에 들어 있었는데 진주성을 함락한 왜병들은 진주의 모든 기생을 불러 축하연을 열었다. 이 축하연에 논개도 물론 참석하였는데 기생 중 논개의 미모가 빼어나게 아름다운지라 왜장이 논개를 가까이하였다. 논개는 '기회는 지금이다.'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왜장을 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이리하여 논개는 남편인 최경회 공은 물론이고 민족의 원한도 갚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의병들은 거룩한 논개의 넋이라도 위로하고자 시신을 건져 운반해가던 중 현재의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부락에 논개의 집안인 주씨가 살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 안장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당시는 주씨 집안에 기생이 있다는 것이 집안의 수치라고 여겨 은폐시켜왔기 때문에 지금껏 찾는 사람도 없이 묘가 황폐화 되었다고 전한다.

효자 앵두나무 설화

임진왜란 이후 삼백 칠십여 년 쯤에 가야읍 백산고을에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효행이 돈독했던 선비가 있었다. 윗대에는 대가벌족(大家閥族)으로 중앙을 무대로 삼던 특권층에 속하였다. 그 당시 중앙의 정치정세의 불안과 탐관오리들의 부조리함을 꺼려서 일직 하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 자녀를 거느리고 낮이면 들에 나가 흙과 벗삼고, 밤이면 사랑방에 자녀들을 불러 모아 글과 행실을 가르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없는 평범한 농부였다.

어릴 때부터 근신하고 어버이 뜻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서당에 다니면서도 배움에는 마음이 없고 오로지 어버이 봉양에만 뜻을 두어 저녁이면 잠자리를 도와 드리고 아침 일찍 문안하는 범절을 다하였다. 조석으로 음식 드리기를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었다. 어버이께서 병으로 불안하시면 근심의 빛이 얼굴에 떠있고, 음식을 전폐하면서 밤새도록 눈 한번 붙이지도 아니하였다. 또한 야 삼경에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어버이 대신 고통받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기도 하였다.

아버님의 등에 등창이 나서 종기에 고름이 가득해지자 입으로 빨아내어 시원하게 해 드리니 마침내 병이 위급하여 운명하시려 할 제 효자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우게 하니 한나절 동안 다시 소생하였다가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운명하시자 애통에 잠긴 나머지 3년 동안 굴건제복(屈巾祭服)을 벗지 아니하였다. 장례를 지낸 뒤에도 매일 산소를 살피고 엎드려 통곡함으로 무릎의 옷이 닳고 떨어져 구멍이 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대 효자의 나이 이미 예순이 넘은 백발이었건만 그의 어머님께서 앵두를 즐기시니 몸소 앵두나무를 심어 정성을 다하여 키우니 해마다 많은 앵두가 열려 그의 모친께서 부족함이 없이 즐길 수 있었다고 한다.

한데 그렇게 앵두를 즐겨 잡수시던 어머니가 별세를 하시자 매양 앵두나무를 어루만지며 슬퍼하였다. 그후 앵두나무에는 꽃만 피었지 열매를 맺지 아니하였다고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앵두나무를 '효자나무'라고 일컬었다. 고사에 비유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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