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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경도

십경도는 이순신의 생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 10가지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다. 이들 십경도는 현충사의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으며, 1970년 4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한 것이다.

십경도1 - 소년시절

소년시절

이순신의 어머니 변씨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나, “우리 가문에 또 손이 날 텐데, 이 손자는 앞으로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니라. 손자가 태어나거든 이름을 순신이라 짓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버지 정(貞)이 그 말을 듣고 이상히 여겨 점을 쳐보니 「길하다, 나이 50이 되면 응당 칼을 짚고 명장이 되리라」하는 것이었더니, 과연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았고 또한 그 뜻을 품었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새벽에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의 형제는 네 형제인데, 그 가운데서 셋째이다. 이 네 형제는 중국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어진 임금 중에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이름자를 따서 맏아들은 희신(羲臣), 둘째 아들은 요신(堯臣), 그리고 할아버지가 꿈속에서 일러 준대로 셋째 아들은 순신(舜臣)이라 이름 지었고, 넷째 아들은 우신(禹臣)이라고 불렀다.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에는 나라가 몹시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도 사화에 연루되고, 끝내 중종의 상중에 아들의 혼인을 성대히 하였다는 누명으로 처벌받았다. 이처럼 나라가 어지럽고 집안도 이 사건으로 피해를 당하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책만 읽고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의 집안은 가난하였고, 어머니 변씨 부인은 삯바느질 같은 것을 부지런히 하여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후 가난한 살림을 서울에서 더 이상 꾸려나가기가 힘에 겨워지자, 이순신 가족은 어머니 변씨의 친정집이 있는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산으로 이사 온 이순신은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과 높은 산을 마음껏 다니며, 역시 전쟁놀이를 즐겼다. 이사 온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마을 소년들의 대장이 되었고, 마을 소년들은 통솔력이 뛰어나고 용감한 대장 이순신을 잘 따랐다.
십경도2 -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청년시절)

이순신이 스무 살이 될 즈음, 북쪽 변경에는 오랑캐들이 넘나들며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겨레의 방패가 되어 나라를 구하리라 결심을 하였다. 당시 무언의 길이 비록 문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이순신은 28세가 되던 해 8월, 훈련원에서 실시하는 별과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이순신은 시험장에서 무예시험 중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이를 바라보던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죽었구나.”고 놀라고 있을 때, 이순신이 한발로 일어나 곁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매고 걸어 나와 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순신이 얼마나 자조ㆍ자립정신이 강했던가를 보여준 일화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순신의 일대기를 보면 남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조ㆍ자립의 정신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순신은 그러한 성품과 신념 때문에 32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였고, 45세에 정읍현감, 47세에 전라좌수사의 벼슬에 올랐다 사대부 제도가의 자손들이 30세 안팎에 큰 벼슬에 올랐던 사실과 비교하여 출세가 상당히 늦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죽마고우인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조정에서 공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가 없어 급제한지 10여년이 지나도록 출세하지 못했다.”고 술회하였다.
이순신은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율곡 이이가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보기를 청하였고, 유성룡도 만나보라고 권한 사실이 있었으나, 이순신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율곡과 유성룡은 이순신의 인격에 감탄하였다. 이순신은 일가친척의 힘을 빌어 벼슬길에 오르는 것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후에 이순신은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나갔고, 이듬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37세 되던 해, 수군생활의 시작이었던 발포만호로 있을 때, 상관인 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큰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나라의 물건이니 벨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한다.
이에서도 공의 바르고 옳은 일이면 행하고 그른 일이면 대항하여 싸웠던 정의의 정신을 또한 찾아볼 수 있겠다.
십경도3 - 여진족을 무찌름

여진족을 무찌름(함경도에서 초급 무관시절)

북쪽 변방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던 오랑캐들도 이순신이 조산보만호로 전출되어 가 국경을 지키자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조산보만호로 부임한 이듬해(1587년, 선조 20년) 8월, 공은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었다.
녹둔도란 함경도 경흥 고을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지만 조산보에서는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녹둔도 둔전관이란 이 섬의 농장을 관리하고 개척민을 보호하는 일을 하는 벼슬이었다.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이순신은 지형을 조사하고 북병사 이일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내 병력 증강을 요청했다.
이곳 녹둔도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랑캐들이 호시탐탐 쳐들어올 기회를 엿보고 있는 곳인데, 지키는 군사의 수가 너무 적으니 군병을 더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여러 번 보냈지만 이일은 이순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순신은 하는 수 없이 튼튼한 나무로 방책을 세우고 그 곳에 10여명의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는 한편 백성들의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 해 가을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뻐하기도 하였지만 한편 불안하기도 하였다. 풍년이 든 것을 알고 곡식을 탐낸 오랑캐들이 쳐들어 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섬 사람들이 논밭에 모두 나와 마을은 텅 비어있을 때, 오랑캐들이 몰래 쳐들어왔다. 그 때 마을을 지키던 진지에는 10명의 군사밖에 없었는데 오랑캐들이 엄청난 군사를 몰고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쳐들어왔던 것이다.
10여 명의 군사들은 용감히 싸웠으나 엄청난 수의 오랑캐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들에서 추수를 돕고 있다가 뜻밖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오랑캐가 짓밟은 마을을 향해 달려왔다. 날쌘 장수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쫓아가 사로잡혀 가던 우리 백성 60여명을 구했다. 이순신은 적과 싸우는 동안 왼편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화살을 뽑고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 녹둔도 싸움에서 이순신의 군사는 크게 승리했지만 10여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농민과 부녀자 수십 명이 오랑캐에게 끌려가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녹둔도 싸움 소식은 곧 북병사 이일에게 알려졌다. 이일은 수비 군사를 더 보내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거절하였던 것을 은폐하기 위해, 강제로 고을 옥에 가두고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며 조정에 올렸다. 조정에서는 이일의 보고를 받고, 충무공에게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하였다.
이순신은 함경도 순변사(巡邊使) 밑에서 종군을 하여, 그 해 겨울 전공을 세우고 죄명을 벗었다. 이순신의 마음은 오로지 나라사랑에 바쳤지만, 벼슬도 없이 고향인 아산의 본가로 돌아왔던 것이다.
십경도4 - 거북선 건조

거북선 건조(전라좌수사 시절)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후 해전에서 일본 전선을 격파하는데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 거북선을 개발했다. 그는 일본 수군의 강점을 무력화하고 조선 수군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전함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나대용과 같은 기술자들과 함께 개발에 주력한 결과 해상의 탱크라 할 수 있는 거북선을 건조하고 이를 통해서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함대를 격파하고 큰 공을 세웠다.
거북선을 건조하게 된 동기는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고,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하였습니다.” 라고 장계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일본 수군의 전선은 기동성이 우수한 반면 상대적으로 내구력이 약했으므로 거북선과 충돌할 경우 적선은 쉽게 깨어져 나갔다. 거북선은 등판 위에 쇠못을 꽂아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이 전선 위로 올라서는 것을 차단했다. 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으며 전·후·좌·우의 사방에서 화포를 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능으로 거북선은 해전에서 적진을 교란하는 돌격선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외에도 이순신은 우리가 갖고 있던 승자총통과 쌍혈총통이 총신이 짧고 총구가 얕아 일본의 조총보다 성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일본군의 조총을 연구하여 그 성능과 화력을 높인 정철 조총이란 새로운 개인화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왜적의 조총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되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똑같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5자루를 올려 보내오니 조정에서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명하여 모두 제작토록 하여 서로 다투어 만들게 함이 좋겠습니다.
이 기록에서 이순신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창의력을 발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함께 사조구(四爪鉤), 장병겸(長柄鎌)등을 만들어 해전에 사용하였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국민의 창의력과 개척정신이 희박했을 때 국운이 기울어지고 급기야는 몰락의 과정을 밟았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왜적이 침략해 오리라고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순신은 영내에 앉아있기만 하지 않고 관하 각 포구를 직접 돌아보면서 무기를 점검하며 방비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4월 12일, 거북선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전란에 대비한 이순신의 이러한 피나는 노력은 수백 척의 일본 전선을 물리치고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또한 깊이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십경도5 - 부산포해전

부산포해전(연전연승)

1592년 4월 15일, 이순신은 경상좌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일본군의 침략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후 원균의 지원 요청을 받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군선을 이끌고 경상도 해상으로 출전한 것은 1592년 5월 4일이었다. 전라좌수군의 출전이 늦어진 것은 ‘조정의 승낙 없이 야전지휘관 임의로 다른 도를 지원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출전하여 원균과 함께 적선을 격침시켜 북상하는 일본군의 군수지원을 어렵게 하라’는 조정의 승낙을 받고 출전했을 때에는 일본 육군은 이미 평양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후 이순신은 임진년에 4차례 출동하여 일본 수군을 격퇴하였다. 조선 수군은 경상우도 ․ 전라좌도 ․ 전라우도 수군의 연합함대였으나 실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있었다. 1차 출동에서 옥포해전 등, 2차 출동에서 당포해전 등에서 승리하고, 3차 출동에서 한산대첩으로 일본 수군의 전의를 완전히 꺾었다.
7월 상순에 일본군이 견내량에 집결하기 시작한다는 정보를 얻은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였다. 이후 견내량이 전투를 하기에 불리한 곳임을 판단하고, 적의 함대를 외양으로 유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돌연히 뱃머리를 180도로 돌려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펼쳤다. 마침내 적선 73척 중에서 7척은 싸우기도 전에 미리 도망쳤고 66척은 바다 속에 가라앉거나 불탔다. 적의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며, 육지로 도망쳤다가 배를 가르고 자살한 장수도 있었다. 이 해전을 일컬어 한산대첩 또는 견내량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4차 출동에서는 적의 교두보인 부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일본군의 해상병참선을 차단ㆍ봉쇄하고 조선의 군사 잠재력 동원 기반인 호남을 적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일본군의 수륙병진 공격 기도를 분쇄하였다.
조선 수군이 이렇듯 승리한 데에는 지세와 조류를 잘 알고 있고 일본 선박에 비해 함선이 크고 견고하고 기동력이 컸으며 천· 지· 현· 황자총통 등의 화포, 신기전, 화전 등 우세한 화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승리의 더욱 근본적인 요인으로는 이순신이 있다. 그는 전략 전술과 용병술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선두에서 지휘하다 총탄에 맞을 정도로 솔선수범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 수군의 연승으로 일본군은 바다로 나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진군하던 일본 육군도 그 기세가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견내량 서쪽바다를 엿보지 않게 되자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길목을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십경도6 - 한산도생활

한산도생활(삼도수군통제사 시절)

전쟁 초기에 일본 수군을 거의 섬멸한 이순신은 계속 적을 소탕하여 오다가 여수로부터 진영을 한산도로 이동하였다.
한산도는 산령(山嶺)에 둘러싸여 있어 일본군의 남해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요지였다. 이곳에서 일본군의 길목을 막으면서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나무를 베어 전선을 만들며,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면서 쉬지 않고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어려운 처지에서 이순신은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적의 재침에 대비하였고 적의 대함대를 앞에 두고, 내일의 전투를 위하여 허리띠를 풀지 않고 칼을 갈며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던 이순신의 임전태세야말로 유비무환의 자위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좋은 실례라 하겠다.
이순신은 남해해상 연해지역의 소탕작전을 꾸준히 계속하다가 1593년 7월, 좌수영을 여수에서 거제 한산도로 옮겨 왜적침략의 수로를 가로막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곤궁에 빠져 있는 피난민을 정성껏 돌봐왔었고 통제사가 된 이후로는 더욱 민생문제와 군량을 염려하여 돌산도와 도양장(道陽場)에 군민 합작의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를 만들고 전선을 계속 건조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즉, 일본 조총을 세밀히 검토하여 정철총통을 제조하였고, 염초(焰硝)를 끓여 만들고 각종 총포를 만들어 전선에 비치하여 주무기로 활용하게 하였다.
아울러 수군의 지휘권을 확립하고 군비를 재정비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또한 한산도에 운주당을 설치하여 누구에게나 중요한 작전상의 의견이나 정보를 제공케 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로서 이룩한 큰 업적의 하나는 지휘계통의 일원화였다. 이제까지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많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나, 원균 등의 시기와 불복종으로 인해서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못했었다.
1594년 2월부터는 지난날 이순신의 위력에 눌려 외해로 나오지 못했던 일본 수군들이 점차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므로 이순신은 함대를 출동시켜 일본 전선을 격파하면서 적의 집결지인 당항포를 습격, 21척의 왜선을 불태워 그들의 야욕을 한풀 꺾어 버렸다.
당항포해전이 있은 후, 4개월이 지난 7, 8월부터는 일본군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長門浦)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과 각 포구마다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이순신은 수륙협동작전을 계획하고, 곽재우 등과 협동으로 장문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진중생활로 인해 피로가 겹치고 기후가 나빠서 무서운 열병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견디어냈다. 그 의지의 바탕에는 자주·자조·자립정신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는 아무 지원도 없는 어려운 진중생활에서도 군량을 비축하고 쇠를 모아 총포를 만들며 군비를 강화하여 연전 연승의 빛나는 공적을 쌓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십경도7 - 충무공의 효성

충무공의 효성

이순신이 건원보 권관으로 오랑캐를 토벌할 때 고향 아산에서는 아버지 이정이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산에서 함경도까지는 길이 멀고 교통이 불편하던 때라 돌아가신지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부친의 부음을 듣고, 그날로 길을 떠나 고향으로 바삐 돌아왔다.
또한 초계 변씨(草溪卞氏) 수림(守琳)의 딸이었던 충무공의 어머니는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78세의 고령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뒤로 이순신은 어머님을 여수 본영의 가까운 곳으로 피난 와 있게 했는데, 거기가 바로 지금의 전남 여천군 쌍봉면 웅천리(일명 곰내 古音川)이다.
이순신이 어머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반가워하고 몇 날만 소식이 막히면 걱정하던 마음은 일기에 구구절절 나타나있다. 병신년 윤8월 12일 일기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님을 찾아뵈었더니 백발이 무수한 채 나를 보시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몇 날 더 보전하시기가 어려울 것 같다. 눈물을 머금고 손을 꼬옥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드렸다.
그때도 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천에서 만나기로 되어있어 그리로 가는 길이었으며 그로부터 전남 일대를 돌던 길에 10월 30일 다시 어머님을 찾아뵙고 여수 본영으로 모시고 와서 7일에 수연상을 차려 장병들과 함께 종일 즐겁게 해 드리고 10일에 어머님을 떠나 밤새도록 노를 저어 한산진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이순신이 어머님과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지금까지 이순신의 글로 전하는 것 중에서 가장 눈물겨운 것은 이순신이 진중에 머무르고 있던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 재상에게 “어머님을 가 뵈옵도록 몇 날의 휴가를 주십사”고 청하는 편지인데 그 내용의 곡진함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저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올해 여든 하나이옵니다. 얼마 전 어머님께서 하인 편에 글월을 적어 보내셨는데, “늙은 몸에 병이 나날이 더해가니 앞날인들 얼마되랴. 죽기전에 네 얼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하셨더이다. 남이 들어도 눈물날 말씀이거늘 하물며 그 어머님의 자식 된 사람이야 어떠하오리까. 그 기별 듣고는 가슴 더욱 산란할 뿐, 다른 일엔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해전이 거의 없는 이 겨울에 가 뵈옵지 못하면 봄이 되어 방비하기에 바쁘게 되어 도저히 진을 떠나기 어려운 것인 즉 각하께서는 이 애틋한 사정을 살피시어 몇 날만 말미를 주셔서, 배를 타고 가 한번 뵈올 수 있게 해주신다면 늙으신 어머님의 마음에 적이 위로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그 사이에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어찌 허락을 받았다 하여 감히 중대한 나라의 일을 그르치게야 하오리까.
비록 짤막한 편지이지만 그 속에는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과 책임감, 그리고 지극한 효성이 모두 한꺼번에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같이 체찰사에게 몇 날의 휴가를 청했던 것을 보면, 이순신이 얼마나 스스로 규율을 엄격히 지키던 분이었던가를 알 수 있거니와, 앞에 말한 병인년 10월7일, 여수 본영에서 어머님의 수연상을 차려 드린 것은 체찰사에게 편지를 보낸 뒤 마지막으로 한일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정유년 4월 11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새벽에 꿈이 산란하여 이루다 말하기 어렵다. 덕을 불러 대강 이야기를 했다. 또 아들 열에게도 이야기 했다. 마음이 몹시 언짢아 취한 듯, 미친 듯, 겁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고,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흐른다.
실은, 이순신의 어머님은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 소식을 듣고 고음천을 떠나 서해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배 위에서 4월 11일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그 꿈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순신의 효심이 얼마나 지극하였던가를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해암 바닷가에 와서 어머님의 시신(屍身)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던 일기가 있다.
십경도8 - 죄인의 몸

죄인의 몸

1596년에 4년간을 끌어오던 강화협상이 깨어지자, 일본군은 다음해 1월에 가토오 및 고니시 등을 동원하여 재침략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먼저 조선 수군을 격멸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으나, 이순신과의 정면대결은 오히려 저들에게 불리하고 참패를 면하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새로운 간사한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조정의 당쟁과 원균과 이순신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이용하여 이순신을 제거하려 하였다.
고니시는 그의 부하 요시라를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진중으로 보내어 밀서를 전달하고, “가토오의 부대가 모일(某日) 바다를 건너 올 것이니 해상에서 맞아 싸워 달라.”는 정보를 제공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밀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왜적의 간계임을 간파한 나머지, 척후선을 보내어 정탐케 하고 직접 출전하지 않았다. 고니시는 다시 요시라를 시켜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오가 도착하였다는 사실과 기회를 놓쳤으니 원망스럽다.”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에 앞서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원균의 활동이 급진전하여 김응남 일당들을 시켜 조정회의에서 이순신을 비방하게 했다. 또한 요시라의 간계는 김응남 등의 서인(西人)들에게 비방하기에 좋은 자료가 되어, 그해 2월 26일 이순신은 공직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는 이변을 맞게 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공은 사형처분을 받을 뻔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청원으로 4월 1일 간신히 출옥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옥에 풀려나온 공은 뒤늦게야 홀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6월에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순신은 또 다시 인고(忍苦)의 세월을 지낸지 한 달이 지난 7월 15일 이순신의 후임자였던 원균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아, 전 함대를 잃고 목숨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원균의 연합함대가 전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권율은 이순신에게 명하여 조선 수군의 뒷수습을 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몸으로써 수군 재건의 중대 임무를 맡아 남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패전의 원인과 일본 수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칠천량해전에서 탈출했던 12척의 전선을 찾아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십경도9 - 명량대첩

명량대첩(통제사 재임명)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어, 겨우 12척의 전선만으로 전세를 수습해야했을 때, 조정에서는 이를 민망히 여겨 공에게 해전을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고 하였으나 공은 해전을 폐(廢)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도록 힘을 다해서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일본군은 전선 50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선군은 12척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이순신은 끝내 해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12척의 전선과 12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알맞은 유리한 지역인 벽파진으로 이동하였다. 벽파진은 진도의 동쪽 끝머리에 위치하여 해남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며, 남해상에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목인 울돌목 즉, 명랑해협이 있는 곳이다.
이순신은 이곳을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을 수 있으며, 적은 수로써 많은 적선을 막기에 알맞은 곳으로 판단했다. 더구나 명랑해협은 길목이 좁은 데다가 조수의 흐름이 빨라 대함대가 자유로이 활동 할 수 없는 곳이었다.
9월 14일, 일본 수군이 벽파진을 향하여 오고 있다는 첩보를 들은 이순신은 모든 전선을 출전시켰다. 일본 전선 133척이 조류를 타고 명랑해협에 돌입해 오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과 휘하 병사들은 “우리들이 다 같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니, 의리상 같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사태가 이에 이른바 에야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는 굳은 결의로 일본군에 대적하였다. 울돌목을 빠져나온 일본 전선들은 외양에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12척의 조선 전선을 겹겹으로 포위하면서 총포를 쏘아댔다. 이에 이순신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전선에 장착된 총통과 각종 화살을 쏘며 반격을 가했는데, 점차 조수의 흐름이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더욱 병사를 격려하고 독전하여 일본 전선을 총공격을 가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31척을 잃고 퇴각하였다.
이리하여 12척의 배로써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랑해전을 대승리로 육상을 마음대로 짓밟던 일본군의 기세를 꺾어 수륙병진의 야욕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리는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
십경도10 - 노량해전

노량해전(충무공의 최후)

1598년 8월 17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장수들은 철군을 하기 위해 병력을 울산, 부산, 사천, 순천 등지로 집결시켰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과 함께 연합함대를 거느리고 왜교(倭橋)에 머무르고 있는 고니시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육군 장수 유정(劉綎)도 가세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이 견고한 진지 속에 숨어서 대항함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왜교로부터 철귀하는 바다를 봉쇄하고 말았다. 즉 왜교 포구 외양에 위치한 장도(獐島)와 유도(柚島)에 결진하였다.
일본군들은 육지와 바닷길이 막히자 크게 당황하여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뱃길을 열어 일본군의 철수를 허용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순신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더욱 더 해상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남해 등지에 산재해 있던 전선을 총동원하여 유도 등지를 가로막고 있는 조선 수군을 견제 또는 격파하면서 마지막 탈출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11월 18일 저녁, 무수한 일본 전선들이 노량에 서서히 집결하였다. 이들은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 노량과 왜교의 중간지점에 결진하고 있는 조선 수군을 협공하려는 것이었고, 그 수는 무려 500여척에 달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그날 밤,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유도를 출발하여 노량 근해에 집결한 일본 수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새벽 2시경,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노량에 도착하여, 여기서 함대를 좌우로 나누어 전투태세를 갖추고 주위의 성에는 복병을 배치한 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포성과 북소리는 고요한 바다를 가르고 기습공격을 당한 일본 전선은 당황하여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대열을 갖추어 결사적인 반격을 가해왔다.
밤새도록 치열한 격전이 계속 되었다. 조선 수군은 총포를 일제히 발사하여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일본군을 사기가 저하되어 관음포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칠 물길이 이미 조선 수군에 의해 막혀 있음을 알았다.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반격을 전개함에 따라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혈전이 거듭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휘를 하던 이순신은 적이 쏜 유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방패로 나를 가려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의 나이 54세였다.
이순신의 유언대로 이순신의 큰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은 이순신은 배안으로 옮기고 이순신을 대신에 독전기를 흔들면서 전투를 계속하여 낮 12시경에 200여척의 일본 전선을 격파하였다. 바다에는 왜군들의 피와 부서진 뱃조각과 일본군의 시체가 낭자하였다. 그러나 적장 고니시는 격전 중에 간신히 달아나고 그때까지 도주하지 못한 50여척의 일본 전선들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안타까운 전사와 함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싸움의 승패에 대하여 유념하고 나라사랑의 뜨거운 정열로 가득 차 있었던 이순신이었기에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이순신은 온 국민으로부터 한결같은 추앙을 받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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