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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로

하동지역

날짜별 백의종군로 장소
1597년
5월 26일
5월 27일 5월 28일·29일 6월 1일 7월 20일 7월 23일 7월
24일~26일
하동 악양 하동 두치 하동 현청 하동 옥종 하동 옥종
이희만의 집
하동 옥종
이희만의 집
하동 옥종
이홍훈의 집
백의종군로

충무공은 1597년 5월 26일 하동 악양의 이정란의 집에서 하루 묵은 것을 시작으로 5월 27일 하동 두치 최춘룡의 집, 5월 28일과 29일 하동 현청에서 머물다 6월 1일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말을 쉬게 하고 단성으로 떠났다.

7월 18일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삼가 단성을 거쳐 7월 20일 오전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현재 하동군 옥종면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7월 21일 충무공은 곤양 노량을 둘러보고 거제 배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7월 22일은 곤양에서 자고 7월 23일 다시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또 7월 24일부터 26일까지는 같은 마을의 이홍훈의 집에서 기거했다.

그러니까 충무공은 하동에서 이정란의 집에서 1박, 두치 최춘룡의 집에서 1박, 하동 현청에서 2박,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2박, 이홍훈의 집에서 3박 등 총 9일을 머물렀다. 주요지점으로는 1)악양 이정란의 집 2)두치 최춘룡의 집 3)하동 현청 4)굴동 이희만의 집이 있다. 그 외 충무공이 말을 쉬게 한 청수역과 정개산성 아래 강정 등이 있다.

악양 이정란의 집 - 5월 26일 머문 곳

악양면 평사리 전경

1597년 당시 충무공이 비를 흠뻑 맞고 찾아간 이정란의 집은 현재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이 조정의 명에 의한 것이므로 당시 악양지역의 중심지인 평사역(平沙驛) 근처에 이정란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진주에서 서쪽 54리에 정수역(正守驛)이 있고, 진주 서쪽 1백 19리에 평사역이 있다고 했다. 지금 평사역의 위치도 어딘지 정확히 모른다. 앞으로 고증이 필요하다.

이정란(李廷鸞 1529-1600)은 임진왜란 때 전주성에서 왜군을 물리쳤으며 이어 공주목사가 되었으나 행정 능력이 부족하다고 사헌부가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정유재란 때 다시 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명나라 장수는 도주하여 없었는데 조정에 읍소하여 전주부윤이 되어 성을 지킨 인물이다.

악양 이정란 집 근처

당시 이정란의 집은 집주인인 이정란이 살지 않고 김덕령의 아우 김덕린이 빌어 사는 집이었다.

김덕린은 1596년 2월 14일 계향유사로서 이순신에게 군량을 지원했던 인물이며 그의 형 김덕령은 권율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전공을 세워 1594년 1월 5일 선전관겸 충용장에 임명된 관리였다. 또한 1594년 9월 27일 선조가 거제도를 탈환하라는 명령에 따라 휘하 의병을 이끌고 이순신 함대와 연합하여 거제도 탈환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덕린의 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아마 당시 김덕린이 집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김덕린이 있었다면 이순신 일행을 문전박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무공이 이정란의 집을 찾아간 것은 김덕린 집이라는 것을 알고 갔을 것이고,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남루한 이순신 일행을 보고 박대를 한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아들을 시켜 김덕린과의 관계를 말하고 청해서 들어가 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역소개-평사리

평사리는 가야시대부터 역참이 있었던 곳으로 육로의 교통이 발달하여 외래 문화의 수용이나 교역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경관도 뛰어나 비옥한 토지와 함께 큰 마을을 형성했다.
악양 최참판댁 또 이곳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土 地>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본래 진주목 화개현의 지역으로서 중국 악양 소상팔경(岳陽 瀟湘八景)의 하나인 평사낙안 (平沙落雁)과 같다 하여 평사라 하였는데,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권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개면의 둔촌과 악양면의 신암, 삽암, 평사역촌을 병합하여 평사리라 해서 악양면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상평(上平),외둔(外屯)을 합하여 평사리로 구성되어 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2005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토지 촬영지로서, 최참판댁과 토지 세트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으며, 매년 10월에는 토지문학제가 이곳에서 개최된다.

사적 151호인 고소성은 신선대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의 축성연대는 AD622년 정도에 신라가 쌓았으며, 성벽 둘레는 약 800m, 높이 3.5~4m정도이다 또한 고소성을 가로질러 형제봉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등산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평사리 305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동정호는 약15ha 면적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되지 않으며, 악양 소상팔경 중의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의 무대이다.

두치 최춘룡의 집 - 5월 27일 숙박한 곳

하동 두치라는 곳은 충무공이 권율 도원수 진중으로 가는 도중인 5월 27일과 8월 3일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는 도중에 들렀던 백의종군로 중 중요한 지점이다.
그런데 지금 정확한 위치는 고증되지 않고 있다. 하동 향토사학자들은 난중일기 중의 두치라는 곳을 두 군데로 추정하고 있는데, 하동읍 광평리 원전 마을과 하동읍 두곡 마을 일대라는 것이다.

하동 원전 마을(두치)

광평리 원전마을이 충무공이 머물렀던 ‘두치’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원전마을이 옛날 두치진(豆恥津)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하동과 광양을 연결하는 섬진교가 있는 지점인 옛 두치진은 섬진강 건너편의 섬진을 경유하여 광양으로 통하는 나루였다.

충무공이 머물렀던 두치 최춘룡의 집은 지금 하동과 광양을 연결하는 지점인 옛 두치진이 있었던 광평리 원전 마을에 있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현재 널리 알려지고 있는 두곡 마을은 1703년부터 1730년까지 27년간 하동 도호부가 있었던 지역으로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두치’와 음이 비슷한 ‘두곡’이라고 불려진 때가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한 후 100여년 뒤이다. 그래서 난중일기 ‘백의종군’ 행로 상의 두치는 나루가 있었던 옛 두치진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최춘룡의 집은 어디 있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지난 1996년 하동군은 충무공 백의종군 행로 표지석을 두곡 마을과 광평리 원전마을 사이에 세웠다. 이는 충무공이 머물렀던 장소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가 없어 두곡마을에서 원전마을 중간지점에 표식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동 현청 - 5월 28, 29일 머문 곳

5월 28일, 29일 양일간은 하동읍성 안 별채에서 고을의 현감과 이야기하며 불편한 몸을 조리했고, 황생원이라는 일흔살이나 되는 노인이 하동에서 왔는데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동읍성

현재 하동읍성은 옛날의 하동읍성 성곽 일부와 그 터가 남아있으며 하동읍성으로 향하는 입구에 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하동읍성은 2004년 5월 31일 사적 제453호로 지정되었다. 고현성(古縣城)이라고도 한다. 해발 100m의 양경산(陽慶山)에 있는 성으로, 1417년(조선 태종 17)에 외성은 토성(土城), 내성은 석성(石城)으로 축성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 1,000여 명이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바람에 다소 훼손되었다.
1704년(숙종 30) 하동현이 현재의 하동읍인 진답리(陳沓里)로 옮겨가기 전까지 하동 지역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다.

현이 옮겨가면서 폐성된 이후 석성 부분이 훼손되었고 성곽 돌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다른 용도로 사용된 탓에 석성 부분은 흔적만 남아 있으나 토성은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길이는 약 1.4km, 높이 1.2m, 너비 1∼2m 정도 남아 있으며 성내 면적은 12만 3017㎡ 가량 된다.
하동 고전 주성마을(하동읍성 입구) 기념비 1980년경 성안마을로 불리는 주성마을에서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화포(火砲)가 발견되었다. 이 화포는 국립 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417년에 축성했는데 둘레 1,019자[尺], 높이 13자로, 성 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성은 높으나 협소하여 전시(戰時)에 방비하기가 힘들다”고 적혀 있다. 성곽의 윤곽이 비교적 뚜렷하게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성이다.

하동군은 오는 2015년까지 고전면 고하리 산 151번지 일원 옛 하동읍성터에 국비 162억원, 도비 35억원, 군비 35억원 등 총 232억원을 투입해 하동읍성을 복원할 계획이다.
현재 하동군은 하동읍성 복원을 차질 없이 추진키 위해 지난 2005년 6월 기본계획 용역을 완료했으며 이에 앞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1·2차 수굴조사를 경남발전연구원에 의뢰 완료했고, 민간 주체인 하동읍성복원추진위원회도 구성했다.
하동읍성은 성곽 길이가 1400m나 되는 성으로 성이 복원이 완료되면 하동군의 전통문화 체험 관광지로 탈바꿈하는 동시에 경남도에서 추진중인 이순신 장군 프로젝트와 연계돼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굴동 이희만과 이홍훈 집 - 7월20일,23일,24일 머문 곳

이희만의 집

충무공이 7월 18일 도원수 진에서 원균의 패전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으로 전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삼가 단성을 거쳐 7월 20일 오전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에 도착했다. 그리고 현재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인 굴동(屈洞)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오늘날 이희만의 집은 개조되어 시골에서 흔히 볼수 있는 스레트지붕과 시멘트 블럭으로 형성되어 최근까지 15대손 이병일 모친이 거주하였다.

이희만의 집에서 멀지 않은 같은 동네인 이홍훈의 집은 후손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나 현재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가로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 1동이 있으며 후면은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이홍훈은 이희억의 아들이자 진사 이희만의 조카로 충무공이 출옥한 후 굴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7월 26일까지 3일을 묵으면서 적을 토벌한 방략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이홍훈의 집 이홍훈의 집은 옥종면 청룡리 중촌 338-3번지 838평의 대지에 위치하였다.

이 집은 재령 이씨(載寧李氏)의 옥종 입향조(入鄕祖)인 군자감 주부(軍資鑑主簿) 종(琮)의 차남 희억(喜億)이 분가하여 살던 집으로 1597년 7월에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 4일 동안 머문 역사적인 집이다.
현 소유주는 희억의 14세손인 병권인데 집이 허물어져 다시 짓기는 하였어도 다른 사람의 손에는 한번도 넘어가지 않고 대대로 전해진 집이다.

청수역 - 말을 쉬게 한 곳

충무공이 비오는 날인 6월 1일 하동 현청을 일찍 떠나 청수역에서 말을 쉬게 했는데, 당시 청수역은 현재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정수마을 시냇가에 있었다.
구 청수역 시냇가 이곳은 1555년 4월 24일 남명 선생이 두류산을 유람하면서 저녁에 들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지족당 조지서의 부인 정씨의 정려가 있다.

남명선생의 두류록에“정씨는 조승선(趙承宣) 지서(之瑞)의 아내이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현손녀(玄孫女)이다. 승선은 의인(義人)이었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능히 선왕의 업적을 잇지 못할 것을 알고 십여 년을 물러나 있었건만 그래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적몰되어 죄인이 되었으나,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등에는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 올리는 일을 폐하지 않았다.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경우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라는 구절이 있다.

옥종면 사무소에서 약 4㎞쯤 떨어진 곳에 대곡리 동곡 마을이 있고, 동곡에서 삼장동가는 재양곡이라는 언덕에 조지서의 묘소가 있고, 그 맞은 편에 부인 정씨 정려가 있다.
묘소에는 남명선생의 묘비와 1998년 후손들이 세운 새로운 묘비가 나란히 서 있다. 묘소 맞은 편에 있는 부인 정씨 정려각에는 비석은 없고 “烈女 中訓大夫 行弘文館應敎 世子侍講院輔德 贈 通政大夫 承政院都承旨 妻 淑夫人 烏川鄭氏之閭"라는 편액만 걸려있다.

정개산성

정개산성은 해발 520m로 산세가 험준하고 특히 서.남.북은 사람이 오를수 없는 가파른 절벽으로 병신년인 1596년 봄에 오리 이원익이 체찰사로 내려와 진주목사 나정언을 대동하고 축성을 독려하였고 이충을 총감독으로 명했다. 성의 규모는 폭이 약5m 길이가 4백m로 내부에 숙식장군창 우물을 두었다. 여기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면 종화천이 성아래에서 동으로 흐르고 덕천강이 남으로 흐르며, 북으로는 지리산이 솟아있고 남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데 성이 완공되기도 전인 1597년 3월 8일 왜구의 침공으로 진주목사 나정언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정개산성으로 피신해 왔으며 이틀만에 목사 나정언은 진(陣)을 버리고 도망쳐 버리니 성은 허무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된 지 4개월 후인 7월 20일 충무공이 이곳에 이르니 진주목사 이현이 종사관 황여일과 같이 찾아와 정개산성의 복구계획을 의논하였다 한다. 그후 8월16일 하동현감 신진이 와서 “초3일 장군이 떠난 뒤에 진주의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을 모두 포기하고 빠져나갔고 스스로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오늘날 1985년 12월 15일 정개산성에서 명문(萬曆十八年九月 日營 鑄成 震天雷里 重八十五斤高州浦匠李勿金)이 세겨진 중완구가 발견되어 보물 제858호로 지정되었다.
이 보물은 하동군 옥종면 종화리 산 57번지에서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318번지에 거주하는 김해성씨가 등산길에서 발견 신고한 매장문화재이다. 원래 이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하지만 최초에는 화통완구 또는 총통완구라고도 한 유통식(포구에 화약과 발사물을 장전함)화기의 일종이다.

강정

강정(江亭)은 문암(文巖)을 의지하고 동남쪽으로 덕천강을 굽어보고 있었는데 강정이라고 불렀다. 가서인(加西人)인 습득 손형이 이 정자를 짓고 노년을 보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았다. 뒤에 군수 최기변의 손에 들어오게 되어 선조 40(1607)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최탁이 선친의 뜻을 이어 더욱 강정을 가꾸었으며 강에 배를 띄워 강을 건너는 길을 열었다.

강정(현재 문암정)

이때부터 원계와 문암을 왕래하는 도선이 생겼는데 1975년까지 약 370년 동안 이용하였으나 교통이 원활하게 되자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 강정은 문사들이 많이 출입하였으며 이충무공이 백의종군할 때 두 차례나 쉬어간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사소한 동갑계 비를 앞다투어 세워놓아 충무공을 비롯한 수많은 명현들의 자취가 서려있는 유서 깊은 곳이자 우리 선현들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아름다운 경관을 해쳐 놓았다.

문암(文巖)은 두 바위가 문과 같은 모양으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문암 (門巖)이라고 하였는데, 문사들의 내왕이 많았기 때문에 문암(文巖)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뒤에 설창 하철이 문암(文巖)이란 두 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는데 지금도 흔적이 뚜렷하다.

본문 책임자, 최종수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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